고향 (이기영 지음, 문학사상사, 1994) 그의 문장은 멋스럽지만 가식이 없다. 넘실거리는 생생함이 있다. 잘 익은 나락, 고즈넉한 오후의 부락 어귀, 달빛이 쨍한 여름밤 밭둑, 비늘처럼 반짝이는 개천의 풍경을 열두폭 병풍처럼 눈 앞에 훤히 펼친다. 그런 글재주로 농촌의 안락함과 따스함만을 그렸다해도 아주 좋은 글이 되었겠지만 은 그렇지 않다. 그 풍경 속에서 움싯거리는 사람들은 결코 서정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기아에 전복되어버린 노동의 가치와 극복을 선택할 수 없는 환난과 비참, 그 안에서 아둥거리는 힘 없는 사람들의 지난한 삶, 이론과 지성의 무력함에 힘이 빠진 자발적 선각자들의 절망과 갈등이 풍경의 속살이다. 자본이 득세하면서 가난과 노동은 대를 잇는 순환의 출발점에 선다. 토지의 신성함과 노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