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읽고 생각하기

관촌수필 (이문구, 문학과지성사, 2000)

김성열 2013. 10. 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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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이문구, 문학과지성사, 2000)

일찍 읽지 않아서 다행인 책들이 있다면 나에게는 이문구 작가의 관촌수필이 그짝이다일찌감치 읽고 기억 저편으로 넘겼다면, 소설을 되짚어 읽지 않는 나의 버릇(현진건의 소설은 예외긴 하다) 덕에 기억 한켠에 먼지만 쌓여갔을테니까.

이 유명한 소설을 왜 이제야 읽었냐고는 하지 마시라그나마 누군가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으니, 타박 대신 축하를 바라는 심정이다.

산마루의 잇닿은 등성이처럼 넘실거리는 문체, 숨소리가 귓전에 흠흠대는 충청도 사투리, 여기에 내가 어설프게나마 겪었던 (진짜가짜 같은) 향촌 부락의 담벼락 아래 이야기들이 책에 그득하다.

제목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어느 옛날 선비가 지은 시의 한구절이라고 해도 좋을만하다일락서산(日洛西山), 화무십일(花無十日)...공산토월(空山吐月). 빈산이 달을 내뱉는다. 처가 이쁘면 처가집 말뚝을 보면 절을 한다고, 이야기의 재미에 빠졌더니 제목마저 그렇게 멋드러질 수가 없다

무슨 이야기일까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 한달음에 읽었다명절 때마다 가기 싫은 먼 시골이 생각나고, 담배밭에서 고추밭에서 어른들이 주고 받던 누구네 집안사에 대한 이바구를 본의 아니게 엿듣던 기억도 났다.

할머님이 6.25 때 공산군에게 총맞아 죽은 개를 돈으로 바꿔왔던(그것도 죽인 그 공산군에게!) 얘기며, 막내 고모님이 잠자는 병에 걸렸던 얘기, 산꼭대기에 며느리 무덤을 올렸던 어느집 얘기, 윗집 형제가 1년 사이에 한자리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얘기, 집이 망하고 끼니잇기가 어려워 밥을 얻어 먹으러 내려왔던 꼭두방재 아랫집 할매의 뒷얘기.

누구에게는 삶의 한 줄기이고, 변곡점이고, 결말이기도 한 것들이 나에게는 그냥 한소절 노래처럼 남아 있다내가 사는데 필요한 얘기도 아니고, 내 삶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 이런 얘기가 왜 내 머릿속에는 아직 남아 있을까이문구 작가도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집안 자랑이나 고향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지는 않을텐데,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저 그리움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고향에 대한 그리움, 잊혀져가는 사람에 대한, 그 품성에 대한 그리움, 그 때의 나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가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나지만, 반푼 시골살이를 체험(그야말로 체험 수준이지만)한 나도 그런 옅은 그리움은 있는 것 같다.

어떤 그리움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막막하긴 하다초여름 아침, 산아래 논밭에 나긋하게 내려앉은 안개를 밀어내고 코 끝으로 스미던 쇠죽 끓는 냄새와 두엄 냄새 정도라면 답이 될까 모르겠다이 책, 관촌수필을 펼치면 훅 하고 풍겨나는 그런 냄새 말이다.

- 멋드러진 책을 추천해준 이에게 매우 감사한다(어찌 보답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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