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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22 40대 남자의 감정 - 분노



분노의 정의

분노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화를 내는 것’, ‘성을 내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욕망의 실현을 부정하거나 저지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결과로 생기는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의 실현’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 갖고 싶은 것을 갖거나 갖기 싫은 것을 내치는 것과 같은 ‘의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욕망의 실현’은 내가 가진 신념이나 의견을 관철함으로써 얻는 인정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이익과 직접 관계는 없어도 나의 신념 체계에서 볼 때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일에 분노를 느낀다.


인간의 역사에서 분노는 오랫동안 파괴적이고 이롭지 않은 감정으로 여겨져 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분노는 어리석음에서 시작하여 후회로 끝난다”라고 했고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는 “분노보다 더 빠르게 광기에 이르는 길은 없다”라고 했다. 기독교에서도 분노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 중에 하나이고, 불교에서도 깨달음의 장애가 되는 삼독(三毒)의 하나로 취급된다. 분노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피해야 할 감정으로 여겨진 것이다. 감정에 대한 관점이 변화한 근대에 이르러서도 분노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분노는 다툼, 죄, 해로움 같이 부정적인 것들과 연관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감정을 인간의 본성으로 바라본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정도가 분노를 가치중립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데카르트는 분노를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갖는 증오과 반감’이라고 정의했다. 데카르트는 경이(놀람), 사랑, 증오, 욕망, 기쁨, 슬픔을 인간의 기본 정념(감정)이라고 했는데, 분노는 그 기본 감정 중 하나인 ‘증오’에 포함된다. 스피노자는 분노를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에 대한 증오’라고 보았다. 분노가 증오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겼다는 부분에서 분노를 바라보는 두 철학자의 시각은 일치한다. 또, 분노라는 감정의 속성에 대해서도 두 철학자의 견해가 비슷하다. 데카르트는 분노를 두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하나는 타인에게 해악이 끼쳤을 때 느끼는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해악이 끼쳤을 때 느끼는 분노다. 데카르트는 특히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하거나 상처를 주었을 때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도 분노가 ‘증오하는 사람에게 해를 가하려는 욕망’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분노를 대해 그 원인을 제공한 대상에 대해 강한 공격성을 지닌 감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분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분노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죽음으로 내몰렸다. 분노의 대상이 된 대상에게 해를 가하고 싶은 욕망이 끌어낸 비극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인류가 이렇게 생존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 분노의 역할도 분명히 있다. 태고 시절, 나와 나의 가족을 해치려 드는 맹수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저 고통을 감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면 인류가 지금처럼 번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다른 집단의 약탈과 공격에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면 ‘국가’라는 집단 체제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는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거나 기폭제 역할을 해왔다. 근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왕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에너지였다.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간 히틀러의 광기를 단죄한 것도 나치즘의 폭력에 목숨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파괴당한 자들의 분노였다. 먼 중국 땅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도 나라를 빼앗은 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한 내부의 적들을 향한 분노를 에너지로 삼았을 것이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만 해도 국가 최고 권력자의 무능함에 분노해서 촛불을 들어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일이 있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사용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분노가 생존을 위해 쓰이는 메커니즘은 이렇다. 상대가 나에게 공격 의사나 적대감을 표시할 때 움츠러들면 상대는 나를 얕잡아 보고 쉽게 공격을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적절한 수준의 분노를 표시할 경우 상대는 저항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분노라는 감정은 존재의 지속과 안전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anger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해가 더 쉽다. anger는 스칸디나비아어인 angr에서 유래하는데, angr는 ‘고통’이라는 의미다. 고통을 받을 때 우리가 느끼는 대표적인 감정 중에 하나가 바로 분노다. 고통은 삶의 지속을 방해하고 안전을 해치는 것이므로 고통을 준 대상을 제거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된다. 즉 고통에 대한 저항의 감정이 분노의 본질인 것이다. 


분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람마다 느끼는 분노의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분노의 감정을 갖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다. 많은 학자들이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제시하는데, 대표적인 것들은 네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신체적인 위협이나 공격이다. 물리적인 위협이나 공격 때문에 생기는 분노의 감정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하려는 본능에 가깝다. 분노는 곧 저항의 감정이다. 위협이나 공격에 저항하지 않을 경우 상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처럼 분노가 솟아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욕설을 하면 화가 나는 것은 욕설 자체의 사실 여부 때문이 아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제거하고자 하는 공격성과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한 저항의 충동이 분노의 감정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노는 스피노자가 말한, 인간이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힘인 코나투스(Conatus)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도 위협이나 공격에 대한 분노를 자기 보존을 위한 충동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괴롭힘을 당할 때 이런 분노를 드러낸다고 한다.


신체적인 위협이나 공격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비단 그것이 나에게 향했을 때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위협과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뉴스에서 누군가가 폭언이나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볼 때 대부분 사람들은 분노한다. 특히 그 대상이 약자이거나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누군가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을 내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타인의 고통을 완벽하게 느낄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고통과 공포가 따르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폭력은 고통을 넘어 인간의 자기 보존 본능을 해체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폭력은 그만큼 강력하고 치명적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폭력의 당사자가 아니어도 본능처럼 코나투스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제삼자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원인은 무력감이나 좌절감이다. 무력감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노력과 행동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 생긴다. 좌절감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혹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드는 감정이다. 이 두 감정은 자신이 원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 환경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아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을 때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출근길에 지하철이 고장 나서 오도 가도 못할 때 화가 나는 이유는 제시간에 출근해야 한다는 목표를 방해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세 번째 원인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 신념 등에 대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존중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흔히 말하는 ‘인정 욕구’가 그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면 우월감을 얻게 되고 자존감이 높아진다. 반대로 기대하는 만큼 존중받지 못하거나 비하의 대상이 되면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열등감은 마음에 상처를 준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준 대상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품게 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우를 의외로 자주 접한다. “잔말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막무가내식으로 업무지시를 하는 직장 상사나 “손님이 해달라면 웃으면서 해줘야지 어디서 인상을 써!”라고 하면서 종업원을 윽박지르는 진상 손님의 갑질은 분노를 일으킨다.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했을 때 생기는 분노도 ‘속았다’는 사실로 인한 열등감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 분노의 원인은 부당한 대우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당한 대우’는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받지 말아야 할 대우는 받는 것도 부당한 대우에 포함이 된다. 누군가에게 멸시를 당한다거나 고의로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상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일터에 가보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일을 몰아주거나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과대 포장을 해서 사람을 헐뜯는다든지 따돌림을 해서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의 분노는 일시적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다만, 이런 부당한 대우가 계속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특히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에는 분노를 표출하기가 쉽지 않다. 위계질서나 관계의 필요성 때문에 상사의 업무 지시나 동료의 뒷말에 일일이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노를 표현하거나 전달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해소되지 않은 나쁜 감정만 마음에 가득 차게 되고 결국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노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분노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분노 표현의 형태는 연구하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구분된다.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구분은 수동적인 분노, 공격적인 분노, 단호한 분노의 세 가지 형태다. 


수동적인 분노는 감정을 회피하거나 드러내지 않는 유형이다. 주로 분노를 일으킨 당사자가 상황을 회피할 때 이런 식으로 ‘분노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냉담하고 강경하게 보이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심하게 자기 비난을 하거나 패배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분노의 감정을 쌓아두고 분노를 일으킨 사람의 등 뒤에서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주변에 나쁜 소문을 퍼뜨리거나 익명을 이용해 비난과 불평을 늘어놓고 인간관계를 방해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 가짜 눈물이 나 거짓 고통을 동원하여 분노를 일으킨 사람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공격적인 분노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유형이다. 심한 경우 폭행, 강간 같은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분노 표현의 유형이며, 분노를 자제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위협이나 협박, 정신적인 학대, 무시, 경멸, 감정적 비난, 고의적 차별 등의 행위도 공격적인 분노 표현에 포함된다.


단호한 분노는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분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분노 표현은 전혀 감정적이지 않다. 분노를 일으킨 행위를 엄중하게 비판하고 합리적으로 처벌하는 선에서 분노 표현이 이루어진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감정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현명한 분노 표현 방식이다.


분노, 피할 수 없다면 줄여라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연구해왔고 분노의 감정도 연구 대상에서 빠진 적인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노라는 감정을 확실히 안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색과 성찰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뇌과학까지 동원해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불변의 진리를 세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넓어진 관계망 덕분에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더 많아졌고 그만큼 더 많은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분노의 감정도 예외는 아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항상 평화롭고 사랑이 넘쳐흐르지만은 않는다.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은 숱하게 생긴다. 나의 직접적인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과의 부딪힘들이 늘어날수록 분노할 일도 더 늘어난다.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도 분노를 자아내는 일들 투성이다.


그래서인지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속에 쌓인 분노를 없앨 수 있으면, 아예 처음부터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면 고민의 마침표를 찍을 수는 있다. 하지만 분노는 그렇게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분노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분노는 다른 감정들과 달라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질투나 시기는 그 대상이 나보다 열등해지면 사라지는 감정이다. 하지만 분노는 그렇지 않다. 분노를 일으킨 대상에게 복수를 한다고 해서 분노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 대상이 죽었다고 해도 분노의 감정은 남는다. 분노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고통받았던 그 순간의 기억이다. 분노가 일었던 순간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분노도 계속 살아있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은 분노가 일었던 순간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분노 반추'라고 한다. 사람이 감정을 기억해 내는 것은 그 감정을 무뎌지게 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분노의 경우 자주 기억해낸다고 해서 무뎌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견고하게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처음부터 분노하지 않는 것은 최고의 방법이다.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긴 마찬가지다. 분노하지 않는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외부의 자극에 정신이 반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깨달음’ 차원의 문제다. 감정을 에너지로 삼아 현실을 살아가는 범인(凡人)들에게 어울리는 방법은 결코 아니다.


분노가 인류의 생존에 기여한 공(功)이 있음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인간사의 숱한 비극을 초래한 과(過)도 많이 쌓았다. 공과는 공정하게 평가되어야 함이 옳지만 분노가 생존에 기여를 할 여지가 희박한 현대 사회에서 분노의 공(功)은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이 평화로울수록 분노의 과(過)만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문제는 과(過)가 크다고 해서 분노라는 감정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감정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정신의 반응이다. 나와 세상의 접점은 늘어나고 있고 내 삶과 주변의 관계망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 그런 환경은 외부로부터 더 많은 자극이 들어옴을 의미한다. 그 많은 자극들은 더 많은 감정을 낳을 것이고 분노도 예외는 아니다. 결국 무의미한 접점을 줄이고 불필요한 관계망을 좁히는 것만이 대안으로 남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아니라 “피할 수 없다면 줄여라”다. 더 이상 줄이지 못한 것들은 내 삶의 무게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분노에 대처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Posted by 김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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