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읽고 생각하기

달과 6펜스(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2000)

김성열 2014. 1. 28. 19:46
728x90


달과 6펜스(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2000)


나이가 마흔쯤 되면 속앓이를 하기 마련이다. 또한 살아감을 위해 노동에 나를 던져넣고 감성 대신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합리성이라고 이름 지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인생을 찬미하는 것도 40대다. 문득 잊었던 것들이 생각나면 약간의 일탈을 시도하기도 한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을 만나거나 술에 빠져보거나, 등산에 빠져보거나 한다. 남은 삶 동안 계속 그런 것들에 빠져 살 수도 있지만 역시나 합리적인 생각이 앞서서 적당히 절충을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50이 되고, 60이 되고,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야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 대부분 그렇게 산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나이 마흔에 이르러 안정된 직업과 행복한 가족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누구도 소질이 있다고 말하지 않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천재 화가가 되었다. 그것은 그가 타히티라는 외딴 섬에서 한센병으로 죽어나간 다음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행복했을까? 속세를 져버린 모양새는 출가한 중과 다를 바 없다. 모양새만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도道를 추구한 것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병을 앓으면서 그린 마지막 그림을 불태워 등신불等身佛이 되었다. 이것도 화장을 하는 중들과 다르지 않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행복했을까?


죽은 뒤에 천재 화가로 취급 받는 일은 그와는 상관이 없다. 죽은 후의 명성은 결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제멋대로인 한 여인의 사랑을 그냥 그 사람의 것이라고 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다. 자기를 멋대로 사랑한 그 여인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였던 것이고, 그 행복은 찰스 스트릭랜드가 추구하는 행복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행복에 몰두함으로써 행복해지려 한 것이다. 그래서 찰스 스트릭랜드는 행복했을까?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잘 하는 것을 하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행복한 것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갈구한 행복은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절정을 느끼는 지점까지 다다르는 것을 행복의 극한으로 여겼다. 그는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 자기 발로 찾아온 블란치 스트로브의 누드화를 그의 남편에게 미련 없이 주었다. 병을 앓으면서 그렸던 타히티 오두막집 벽의 벽화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태워버렸다. 절정을 맛본 이상 더한 행복을 찾으려는 것은 그에게 무의미했다. 그는 절정의 끝점을 자신의 궁극의 행복으로 여겼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행복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했기 때문이며,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완성한 절정에 끌려다니지 않고 그것의 시작과 끝을 본인이 스스로 결정했다. 그는 남이 만든 행복의 정의 안에서 자신만의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곱씹어볼 일이다. 아프겠지만 찰스 스트릭랜드 역시 그 아픔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