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읽고 생각하기

시가 나에게로 왔다 (김용택 지음, 마음산책, 2001)

김성열 2014. 8. 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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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에게로 왔다 (김용택 지음, 마음산책, 2001)


나는 시를 모른다.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른다. 그래서 책장에 드문드문 보이는 시집들에는 손이 잘 안간다. 그저 몇몇 간드러진 표현에 매력을 느끼고 흠~ 하며 시 한편 알게 된 것이 좋다고 느끼는 정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시가 궁금해졌다. 생각과 논리가 아닌 정서와 감정을 텍스트로부터 느끼고 싶었다. 


나는 소심했다. 뭣도 모르는 채로 황지우에게, 기형도에게, 김수영에게, 장정일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김용택 시인이 사랑하는 시라면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골랐다. 말이 좋아서 그렇지 베스트 음반집 사는 것과 별다르지 않다. 그런데 시작부터 황지우다. 솟아오르려는 소심함을 무릅쓰고 읊조려본다.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 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부분)


김용택 시인은 오만하고 당당하고 대단하다 했다. 시인은 무릇 이래야 한단다. 덧붙인 그의 말들도 시와 진배 없다.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넘길수록, 제 각각 모양으로 한올 한올 땋은 말들을 입술로 자작거리며 시인들이 참 멋진 사람이라고 또 생각했다.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 봄밤, 김수영 (부분)


그러다 툭, 숨이 멎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는 신비로움. 김용택 시인이 가장 많이 고심해서 골랐다는 김수영의 시가 훅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내 안으로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는다. 내가 스스로 빗장을 걸어 숨겨둔 나의 감정이 결박을 끊고 내 앞에 드러난다. 찌릿한 시의 느낌.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자화상, 신현림 (전문)


너울거리는 감정의 물결들을 타고 익숙하지 못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비틀댄다. 여전히 알지 못하겠다. 기껏해야 알듯말듯이다. 그래서 나의 비틀거림은 당연한 것처럼 나의 견고하고자 하는 마음을 무시한다. 길이 보일까. 시를 알 수 있을까. 나도 울어야 할까. 그렇게 창을 내어야 할까. 김용택 시인이 옮긴 말처럼 사랑과 열정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하니 소심함이 또 슬슬 발동을 한다.


책상 위에 두고 생각이 갈 때마다, 눈이 닿을 때마다 뒤적거린다. 여전히 모르겠다. 더 많이 알았다고도 못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재촉할 일도 아닌 것이, 책의 끝에 김용택 시인은 '멀리서 느리게 오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갓난 아이가 칼을 겁내지 않는 것은, 압도당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날카로움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시에 압도되지 않는 것은, 엄숙함에 떨지 않는 것은 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리게 오고 오래 가슴에 남는다고 했으니, 재촉하지 말고 그렇게 기다릴 일이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예전보다 조금은 더 반가울 것이다. 시는 원래 그렇게 오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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