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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인생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박현석 옮김, 예림미디어, 2008)

김성열 2014. 8. 1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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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인생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박현석 옮김, 예림미디어, 2008)


이 세계를 가능한 것 중의 최악으로 여기며 인간을 맹목적인 생명충동이라는 의지에 예속된 '내부의 시계 장치로 작동하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본, 근대 이후 염세주의의 맹아였던 쇼펜하우어가 인생과 행복을 말하는 것은 무척이나 낯설고 얼떨떨한 일이다. 그는 삶을 고통일 뿐이라고 했으니 그가 말하는 인간의 삶에서는 행복이 불가능하다. 항간에서는 자살옹호론자로까지 일컬어지는 그이니 '행복'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그와 어울리지도 않는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이런 글을 쓴 이유나 의도에 대해서 굳이 이해하려 노력하진 않았다. 다만 다음처럼 염세주의자의 행복론을 인식했다. '살아봤자 좋을 것 없는 인생이지만 마지못해 산다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고자 하면, 이렇게 살아봐.'라고 말이다. 이 책의 서언에서 그런 의도가 슬쩍 보인다.


여기서는 인생론이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인생 그 자체의 내부에서 바라본 내재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즉 가능한 즐겁고 행복하게 인생을 보내는 기술이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기술의 지침서는 행복론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행복한 생활인지에 대해서는 객관적 기준보다는 주관적 판단에 따라 냉정하게 숙고한 끝에, 살아 있지 않은 것보다는 월등하게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생활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과연 인생이 이와 같은 생활에 대한 개념(행복이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이 영원하게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에 부합하는지, 혹은 부합할 가능성은 있을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내 철학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려 드는 것이(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해 일찌감치 'No'라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외재적 관점을 배제하고 삶 그 자체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살고 있다는 인간 본래의 미망"을 비난했지만 이 책에서는 그 미망을 나름대로 긍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긍정은 삶의 희망이나 낙관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미망(迷妄)은 어디까지나 미망이기 때문에 내재된 희망이나 낙관의 수준이 높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그런 희망이나 낙관을 찾을 수도 없다. 자연은 개체가 아니라 종들을 돌볼 뿐이며 그런 덕분에 세계는 오로지 맹목적인 생명충동의 소용돌이가 도는, 개인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외부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런 외부에서 이탈하는 것을 '그나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말한다. 절망과 비관의 세계와 거리를 둠으로써 상대적인 안정과 평화를 취하는 것이다.


재능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이 없도록, 상처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간의 여유와 안정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하고 은근한, 그리고 유혹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생활방식을 추구하며 이른바 세상 사람들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게 된 뒤부터는 오히려 은둔과 한거를 즐기고 특히 정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차라리 고독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곧 허영심에 대한 향락, 부와 권세에 대한 욕망, 허세와 겉치레, 명예와 자긍심 따위에서 멀찍히 떨어지는 것, 세계와의 관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관능적이고 물질적인 욕망 대신 우월한 정신적 욕망을 키워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생명충동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홀로 있을 때뿐"이므로 고독은 (자살만큼이나) 현실적인 수단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를 결코 바꾸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인생을 향한 열망'을 긍정한 것이 아니라 비관만 가득한 세계에서 덜 고통받고 덜 절망하는 법을 얘기했을 뿐이다. "사람의 일생은 겁을 먹고 떨며 위축될 만큼 소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복을 구하는 짓은 그에게 여전히 의미가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서 삶과 세계에 대한 긍정을 찾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절망과 고통이 가득한 세계에서 종의 유지를 위해 단조롭고 고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그의 관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유효한 구석이 있다. 만약 그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동의한다면 이만한 처세서도 없을 것이다. 행복하긴 글렀다고 해도 더 불행해지지는 말아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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