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읽고 생각하기

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5)

김성열 2014. 8. 1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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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2005)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여겼던) 강박과 열등감, 피해의식에 삶이 뒤틀려버린 몇몇의 환자가 '입 다물고 주사부터' 놓길 심하게 즐기는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만난다. 이라부는 치료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치료라고 부를만한 일도 하지 않지만 능구렁이 담 넘듯이 환자의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당사자들은 당황한다. 100킬로그램은 족히 되는 큼직한 이라부가 그들의 안으로 밀고 들어온 통에 자신은 자신의 밖으로 밀려난다. 저항할 수도 없다. '왜 그런지 저항할 기력마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밖으로 밀려난 그들은 가면에 가려져 있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문제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라부와는 별 관계 없이) 자신을 치유한다. 삼삼한 해피앤딩.


현대인들이 자의로 또는 타의로 뒤집어 쓰고 있는 가면은 의외로 무겁고 두껍다. 그 무게와 두께를 모른 채 살다가 죽으면 만고에 속은 편하다. 하지만 부지불식 간에 가면을 알아채거나,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을 일순간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면 삶은 뒤틀린다. 가면이 온전해야 정상 유지되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취급받는 삶에서 가면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과 충돌하고 거부 반응을 끌어낸다.


뾰족한 것이 무서운(무섭게 되버린) 사내는 야쿠자의 가면을(고슴도치), 사람들 눈에 띄는 엉뚱한 짓을 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기 힘든 사내는 젊잖은 의사의 가면을(장인의 가발)을 억지로 쓰고 있는 통에 난데 없는 뒤틀림을 경험한다. 반면에 자신의 가면을 지키기 위해, 이미 익숙한 것에서 내쳐질까봐 하는 두려움이 삶을 뒤틀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내는 서커스 극단의 주연 배우의 가면을(공중그네), 자신의 포지션을 빼앗길까 하는 두려움에 송구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내는 9년 경력의 스타 야구선수의 가면을(3루수), 명성을 지키려는 욕망에 부대껴 토악질을 해대는 여인은 베스트셀러 연애작가의 가면을 지키려 애쓴다.


이라부는 그들을 치료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가면을 벗어 던진 그들이 될 뿐이다. 겁도 없이 야쿠자의 담판에 참여하고, 둔중한 몸으로 공중그네를 시도하고, 의과대학 학장의 가발을 벗기는 극악한 장난을 치고, 소질이라고는 쥐며느리 두번째 다리 만큼도 없는 주제에 야구를 하고, 되지도 않는 글 솜씨로 출판까지 하려 든다. 


그는 아픈 이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가면을 벗은 그들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거친 동요와 묘한 동조을 끌어낸다. 그렇다고 치료를 목적으로 그가 그리한 것도 아니다. 그는 치료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싶은만큼 했을 뿐이다. 좋게 봐야 이라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능력이랄까.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가면을 쓰는 것이 어른스러움과 교양의 상징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의 고통은 가면을 벗어던진 ‘영락없는 다섯 살짜리 아이’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힘도 없다. 하지만 이라부의 민낯은 우리에 대한 조소가 아니라 위로에 가깝다. 아니, 위로다. 여차하면 가면 따윈 벗어버리라는 말을 그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이는 어딜 가도 드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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