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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7)

김성열 2014. 7. 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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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2007)


<국화와 칼>은 적어도 서양인보다 동양인에게, 특히 한국인에게 와 닿는 부분이 제법 많다. 비록 한국에 대해서 언급이 전혀 없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관습적 유사함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 즉, 문화 개방을 동반한 사회 변혁기의 36년이라는 시간에서 기인함을 쉽게(또는 섣부르게) 짐작하게 한다. 한 쪽이 일방적인 권력을 휘두른 36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회의 문화를, 한 국가의 관습을 좌우하는 데 넉넉했다는 그런 짐작 말이다.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수 백, 수 천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습속이 단 36년의 시간만으로 모두 변화되거나 일소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저자의 사람됨과 출처 때문에 논란이 된) 책에서 언급된 '혼네''다테마에'를 한국인의 특징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계층적 지위 때문에 최고의 경의를 받는 사람조차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계층제의 수뇌부를 차지하는 관리가 실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도 우리와 사뭇 다르며 "나이에 따라 그때 그때의 상황에 적합한 생동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도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행동 동기가 '기회주의적'이라면 오히려 한국인의 행동 동기는 그보다는 고지식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관습을 포함한 문화의 피상적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유사점을 발견하기는 쉽다. "쌀 세 홉만 있으면 데릴사위가 되지 말라"는 일본인의 속담과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라는 우리의 속담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이광규 교수(문화인류학)는 이 책 마지막 장의 해설에서 "처음 <국화와 칼>을 읽으면 일본이 우리와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고 두 번 읽었을 때쯤에야 비로소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두 번을 읽어 극명한 차이를 발견한다고 해도 일본과 한국의 피상적인 유사함에 대한 판단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에게 사회가 바라는 모습은 곧 그 사회의 권력이 바라는 모습이다. 권력의 요구와 압력에 따라 사회 구성원이 가져야 할 몸가짐과 추구해야 할 인간의 상이 정해지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유교의 원리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을 500년 이상 겪으며 집안 어른에 복종하고 권력자인 왕에게 충성하는 선량한 백성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우리의 행동 동기였다.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의리와 의무, 충과 효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그것을 실행하고 추구했다. 유교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내렸지만 그 갈래는 서로 다른 모습이었으며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권력이었다. 


일본을 정서적으로 반기지 않는 성향이 지배적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36년간의 피지배,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권력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강제 당하거나 스스로 노력한 것이 지금의 피상적 유사함의 근원임은 확인하는 것은 속 쓰린 일이다. 하지만 의의는 있다. 그 피상적 유사함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 유사함은 어디서 기원했으며, 어떤 것들이 그 대상인지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것들을 걷어낼 수 있다.


한국인에게 문화인류학적 측면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그렇게 절절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 한국인 자신을 뒤덮고 있는 강제와 비자발적, 자발적 노력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치부가 될 지라도, 치부를 확인하지 못하면 치부를 없앨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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