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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2005)

김성열 2014. 9. 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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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2005)


제목이 말하듯이 저기 콜롬비아 구석에 붙은 마콘도에 터를 잡을 부엔디아 가문은 5 100년 동안 고독했다.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새로운 낙원을 찾았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부터 5대를 걸치는 동안 부엔디아 가문은 고독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사람 투성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가문의 종지부를 찍는다.

 

부엔디아 가문이 고독했던 이유는 그들이 철저한 타자(他者)였기 때문이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터를 잡은 마콘도는 그에게 이름을 부여받았을 뿐, 이름이 없었던 그 곳의 입장에서 그는 외지에서 온 타인이었다. 또한 그는 서서히 밀려드는 새로운 문명과 이질적인 문화 앞에서 타인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방안에 쳐박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지만 이미 외부에서 기인한 문명에 대해 그가 타자라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아들인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스스로 타자의 속성을 벗기위해 마을을 떠나 막무가내로 세상을 접하는가 하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타자와 주체의 관계를 뒤집을 수 있는 혁명의 수뇌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 실패했고 역시 타자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후로 그의 아들과 딸들, 그의 손자와 손녀들도 제각각 타자의 허물을 벗어버리려 애썼지만 결국 그렇지 못했다.

 

5 100년 동안, 부엔디아 가문이 타자에서 벗어나려, 고독에서 벗어나려 애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꼬리를 문 뱀과 같았다. 가문 안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틀고 있던 고독은 다시 고독을 낳고 또 고독을 낳았다. 고독의 핏줄은 마치 근친상간처럼 부엔디아 가문 안에서 묵은 피를 토해내고 그것을 다시 주입하는 과정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의 근친상간은 결국 돼지꼬리 아이라는 완전한 타자로 마무리된다. 고독을 벗어나는 길은 죽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완전한 타자가 되는 것 뿐이니라.

 

이 소설은 어쩌면 작가의 고국인 콜롬비아의 타자적 위치를 녹여낸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있었던 일인 듯 생생하다. 현실을 떠난 마술 같은상황들마저 정말인듯 느껴질 지경이니 이 소설을 평가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허세가 아님을, 노벨 문학상 수상이 괜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겪는 고독은 지독하게 느껴질만큼 리얼하다. 인간의 고독을, 그 고독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이들의 고독을 명징하게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슴 먹먹한 일이 아닌가. 벗어날 수 없는 고독임을 알며 내가 맞닥뜨릴 수도 있는 고독이니 더 그렇지 않은가.

 

말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집안에 넘쳐흐르는 새로운 생명력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노년기를 훌륭하게 보내는 비결이란 고독과 영광스러운 조약을 체결하는 길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독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고독하지 않기 위해 애쓴 자들이 선택하는 고독은 영광스러운 조약이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는 무릎꿇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조약은 그저 굴종을 미화한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허세를 부려서라도 벗어나고 싶어했던 고독이라면 그 얼마나 지난했을까.

 

그때가 되어서야 우르슬라는 자기의 우둔함이 노쇠함이나 어둠이 거둔 첫 승리가 아니라, 시간이 내려준 형벌임을 깨달았다.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에게 고독은 형벌이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 수도 없이 받는 형벌이기에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했고 허세를 부려서라도 고독의 범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민하고 영특할수록 그 고독으로부터의 자극은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래서 저항하고 반항하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은 고독과 타협을 하고 골방에 들어앉아 우둔함과 노쇠함으로 그 날카로움을 무뎌지게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그들의 승리가 아니라 형벌에 지나지 않는다. 고독은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형벌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이 많은 사람들과 이 좋은 문명의 이기 앞에서 고독에 민감해 하는, 그래서 사람들 속으로, 문화와 문명의 이기 앞으로 몸을 내던지는 현대의 인류와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같은 형벌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의 줄기에서 잉태된 인간은 타자의 피를 머금고 태어났기에 영원히 이 고독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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