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의 기초공천폐지는 예견된 패배와 정치인의 신의를 두고 저울질을 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예견된 패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여당이 기초공천폐지를 하지 않을 때 (지금으로서는 그럴 확률이 크다) 기초공천폐지를 시행한 야당의 선거 패배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새정치민주연합은 닭(그 닭이 아니다)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다.
거대한 두 개의 당이 이기면 여당, 지면 야당을 번갈아 하는 우리의 정치 풍토에서 모든 선거는 '당 vs 당'이었기에 무공천으로 당의 이름도 없이 후보가 나올 경우 여당의 반대표가 갈 곳을 잃고 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공천도 받지 않은 반여권 후보끼리 후보 단일화를 하지도 않을터이니 후보의 난립과 표심의 방황이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은 꼭 투표를 해봐야 아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약속인가
정치인의 신의라는 측면에서 기초공천폐지를 볼 수도 있다. 비록 부작용이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새정치민주연합의 속내, 정확하게 말하면 안철수-김한길 대표의 속내일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믿음이 바닥으로 내려 앉은 환경에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정치적 블루오션까지는 아닐지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은 원래 당연한 것 아닌가) 그 '정상적인 태도'가 몰고올 신선함은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대신 큰 것을 잃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초공천폐지라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 지방선거를 패배한다면 그 책임의 소재가 모호해진다. 비록 선거에서 지긴 했지만 기초공천폐지라는 약속을 지켰으니 일방적으로 정치인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분위기가 된다. 더구나 새누리당이 기초공천폐지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여당의 반칙으로 인한 선거 패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책임은 온데간데 없이 약속을 지키는 '아름다운 정치인'만 남고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약속을 지킨 것인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감성 충만한 신념정치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의 안철수-김한길 대표는 전형적인 신념정치를 펼치고 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 뽑을 것이다."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100년 전에 막스베버가 신념윤리가들을 비평한 말이다. 서글프게도 이 말이 안철수-김한길 대표의 태도와 묘하게 들어맞는다.
정당정치는 투쟁을 기반으로 존속한다. 막스베버의 말처럼 "정당 사이의 모든 투쟁은 본질적 목표를 위한 투쟁"이며 투쟁 그 자체는 승리라는 본질적 목표를 갖는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의 기초공천폐지는 승리라는 투쟁의 본질적 목표는 없이 약속, 신의 따위의 감성에 매몰되어 있다.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이해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동의를 하기는 어렵다. 정치적 투쟁에서의 승리라는 정치인의 책임이 결여된 의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춘추전국시대, 양공(襄公)이 이끄는 송나라가 초나라와 전투를 하게 되었다. 송나라와 초나라가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게 되었고 초나라가 먼저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다. 초나라가 강의 물살을 헤치고 오는 것을 보고 송나라의 장수가 양공에게 적이 강물을 건너느라 쉽게 움직이지 못할 때 공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양공은 그것은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라면서 공격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강을 건너와 진용을 갖추느라 분주한 초나라 군사를 보고 송나라의 장수가 지금 공격할 것을 양공에게 건의했다. 그러자 양공은 군자가 할 짓이 아니라며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초나라의 진용이 갖춰지고 나서야 비로소 송나라도 전투에 임했는데 결국 송나라는 개박살이 났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송나라 양공의 쓸데 없는 인의'라고 비웃으며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했다.
안철수-김한길 대표는 정치적 투쟁의 승리자 보다 그저 인의를 숭상하는 송나라 양공이 되고 싶은 것인가? 정치에 있어 대의와 명분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정치의 본질을 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 대의명분도 승리를 위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정치적 목적일 수는 없다.
정치적 낭만 대신 정치적 책임을
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면, 대의와 명분이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정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치는 현실이고 현실을 바꾸기 위한 것인데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들을 기만하는 행위다. 정치적 승리가 있어야 대중들이 원하는 형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신념보다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들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어야 하는 책임에 더 민감해야 한다.
안철수-김한길 대표가 적어도 한 정당의 수뇌를 맡고 있다면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 오히려 그 책임을 위해 자신의 신의를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막스베버의 표현처럼 "단지 낭만적 감흥에 도취하고 있을 뿐인 허풍선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그럴려고 합당한 것은 아니잖는가. 합당의 목표가 정치적 투쟁에서의 승리라면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합당의 목표가 기초공천폐지라는 누군가의 정치적 신념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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