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어리고 소소한 생각

어르신들이 박정희-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

김성열 2014. 3. 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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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을 빌미로 독재를 했던,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조치까지 해가며 만 16년 동안 대통령 자리를 꿰찼던 '반민주주의적' 인물이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 여론 조사에서도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 그의 딸이 - 정치적 업적이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 대통령에 당선된 것으로 그에 대한 지지는 충분히 가늠이 된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 독재자가 지지를 받는 것은 미스테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박정희-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실제로 박정희의 독재 시대를 살았던, 지금은 '어르신'이라고 불리는 세대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표면상) 사상이 통제되지 않고 언로(言路)가 열려 있는 지금 시대에 박정희의 공적만큼이나 과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은 왜 여전히 독재자를 흠모하는가에 대한 궁금함은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답답함이 된지 오래다. 


인지부조화의 극복

왜 어르신들이 박정희-박근혜를 지지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는 '인지부조화'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인지부조화는 하나의 인지가 다른 인지와 일치하지 않아 부조화가 발생한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내가 알거나 느끼고 있는 것이 실제와 다를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이다. 이런 부조화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지부조화에 직면하면 그 불일치를 제거하여 불편함에서 벗어나 균형을 회복하려 한다.


박정희를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믿고 있던 어르신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비민주적인 독재자로 역사의 평가를 받는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이는 어르신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과 실제(상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와의 불일치이며 부조화의 원인이 된다. 인지부조화의 극복 방법은 여러가지지만 여기서 선택의 방향은 크게 두 갈래다. 기존에 가졌던 '훌륭한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인지(인식)을 철회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고수하거나이다.


배 안고파본 놈들이 뭘 알어

대다수의 젊은 세대(박정희-박근혜를 지지하는 젊은 세대도 존재하므로)와 대립의 각을 세우는 어르신들은 박정희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고수하는 쪽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어르신들은 인지의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평가, 비민주적인 통치를 했다는 부분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아예 문제 자체를 없거나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어르신들은 그를 '지독하게 가난했던 대한민국을 이만큼 잘 살게 해준 사람'으로만 평가한다. 그 외의 것들은 문제로 보지 않는다. 독재, 비민주를 얘기하면 "젊은 놈들이 배가 안고파 봐서 그래~!"라고 일갈을 할 뿐이다. 배고파 본 사람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렇게 얘기한다. 나중에 인지한 것을 부정해서 기존의 인지를 고수하는 것이다.



훌륭한 독재자?

그렇다고 독재의 정당성을 얘기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재가 정당해지려면 그 독재자가 지금도 독재를 하고 있어야 한다. 독재자가 사라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고해진 마당에 독재의 정당성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함익병 같은 사람이 예외다) 그저 자신의 인지를 부정하는 자들을 '빨갱이'로 몰아갈 뿐 '훌륭한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인지에 대한 변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독재를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은 어르신들에게 딜레마다. 독재를 인정하면 자신의 인지를 수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를 독재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빨갱이'라고 몰아부친 '배부른 젊은 놈들'의 수괴인 김일성 3대와 박정희가 동급으로 얽힌다. "박정희가 독재가 아니면 북한도 독재가 아니겠네요?"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맞딱뜨리는 것이다. 그러니 전쟁, 가난, 빨갱이 따위의 자신들의 경험들만 앞세울 뿐이고, 기껏해야 '독재를 하긴 했지만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게 왜 말이 안되냐고 또다시 반론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히틀러나 김일성, 김정일도 얼마든지 '훌륭한 독재자'가 될 수 있다.


존재의 이유 찾기

답답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굳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답답한 것이다. 박정희가 독재자라고 평가받는 것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것만큼이나 어르신 본인의 안위와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와 눈을 틀어막고 굳이 박정희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간직하려는 것은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다. 어르신들이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기존의 평가를 고수하는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르신들의 '존재의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쉽게 말해 늙을수록 세상에서 멀어진다. 더이상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에게 얹혀가는 모양새가 되고야 만다. 늙음이 서러운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늙음이 서러운 것은 존재의 가치가 조금씩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늙음에 대해 그렇게 모질지 않다. 모두가 늙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늙음에는 늙음의 깊이만큼 '경험'이 녹아 있기에, 그 경험이 지금의 바탕이기에 우리는 늙음을 존중하고 우대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고집하는 어르신들에게는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박정희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을 만든 경험이 있다. 그 어르신들은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박정희에 대한 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인지가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쉽게 인지를 철회하거나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박정희에 대한 인지를 바꾸는 순간 자신들의 경험이 갖는 의미가 달라지거나 퇴색하기 때문이다. 


늙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은 젊음보다 경험이 많으며 그 경험들이 지금 젊은 세대에게 자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늙음의 존재가치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어르신들에게 '경제발전'이라는 긍정적 경험을 '독재', '비민주' 따위의 부정적인 경험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두 형태의 경험이 공존토록 하면 그만큼 경험의 가치를 떨어뜨리라는 얘기다. 경험의 가치가 떨어지면 존재의 가치도 같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박정희를 지지하는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경험의 가치가 낮아져 존재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가 낮아진다는 것은 존재의 이유에도 영향을 준다. 나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일이다. 누가 그토록 쉽사리 자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이유

정치적 업적이라고는 약에 쓰려해도 찾기 어려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이유도 이 관점에서 보면 어느정도 풀이가 된다. 박정희가 흙으로 돌아간 후 전두환, 노태우의 연성화된 군사정권 이후에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민주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많은 어르신들의 경험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험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존재의 가치와 이유도 축소되었다. 때론 민주정권에 손을 들어주기도 했으나 그렇다고해서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의약의 발전과 사회의 안전망 확대와 더불어 생명의 연한은 길어지고 있었지만 늙음의 가치, 경험의 가치,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저 박정희가 최고의 대통령이라는 인지를 위안으로 삼아 자신들의 경험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그러던 중에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했다. 정치적 업적, 직무 수행 능력, 말주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경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독재자의 딸을 지지했다. 박정희의 피를 물려받은 박근혜는 어르신들에게는 박정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한번 박정희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박정희의 가치와 함께 어르신들의 40여년 전 경험이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매듭의 끝은

존재의 가치, 존재의 이유에 대한 고민과 갈망은 쉽게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존재가 사라져야만 비로소 매듭지어질 따름이다. 젊은 세대들의 눈에는 어리석게만 보이는 독재자와 그 딸에 대한 지지는 세대 간 정치적 대결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존재의 가치와 이유를 싼값으로 취급당하는 어르신들의 울컥함이 빚어낸 몸부림의 파편이다. 


한쪽은 정치, 정부의 기능, 국가의 구조 따위의 발전과 개선을 위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존재의 가치와 이유를 확대하길 원한다. 이처럼 양측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대결이라는 말은 무색할 수 밖에 없으며 화해와 설득이라는 말도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어르신들께는 섭섭한 말인 줄 알지만, 박정희-박근혜를 지지하는 어르신들이 눈을 감기 전에는 극과 극의 경험을 보유한 양 세대의 조화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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