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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유성인 옮김, 하서출판사, 2007)

김성열 2014. 3. 2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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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유성인 옮김, 하서출판사, 2007)


'죄와 벌'의 주인공은 라스콜리니코프지만 이야기의 맺음을 이루는 사람은 소냐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세상은 커녕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마저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며 자기애(自己愛)가 현저히 부족한 인물이다. 그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우월한 직관으로 세상을 본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애정을 품기에는 비탄과 절망, 곤궁함이 너무 많다. 그런 세상을 더 알아갈수록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안으로 침전하며 결국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사적인 목적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도 마치 대의가 있는 듯이 변명을 하는 용렬한 허무주의자가 된다. 죄가 확실한만큼 그에 상응하는 단호한 벌 또한 아깝지 않은 범죄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황색 감찰'을 받은 소냐가 구원한다. 소냐는 세상의 비탄과 절망, 곤궁함의 상징이며 이는 곧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의 근원이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고뇌의 근원을 마주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냐는 신앙의 표상으로 해석된다. 이야기 속에서도 소냐는 비록 창녀라는 가장 낮고 비천한 신분에 있었지만 신앙심으로 충만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인간에서부터 그 믿음을 넓혀 간 것은 생각하면 소냐를 신앙의 표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따라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종교적인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이해하는 것 역시 무리가 없다.


신앙은 완전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그 근원이다. 신앙의 근원인 연민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도 규정한다. 불교에서는 자비가, 기독교에서는 사랑, 이슬람교에서는 박애가 그것이다. 각각 다른 단어이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 우리말로 하자면 '사랑'이라는 말로 응축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신앙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회복했다는 의미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받을 수 없으며 사랑 없는 삶은 피폐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타자(他者)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다움을 이룰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비록 러시아 정교라는 신앙을 이야기의 바탕에 깔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범종교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타자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 것은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타자(他者)보다 우월하게 여기거나 무관심, 이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가능했다. 그가 외면하고 싶었던, 외면했던 고뇌의 결정체인 소냐를 받아들인 것은 무관심과 이기심, 우월감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다. 그가 비록 신앙이라는 사랑의 집약체를 통해 구원을 받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사랑을 주고 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종교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일 뿐, 사랑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록 소냐의 신앙심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을 열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한 것은 소냐의 사랑, 소냐를 향한 사랑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인류의 공통 신앙인 '사랑'에 대한 찬미이자 대중을 향한 인간애 회복을 외친 장엄한 설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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