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읽고 생각하기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푸른나무, 1992)

김성열 2014. 3. 12. 13:00
728x90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푸른나무, 1992)


꽤 매력있는 '지식소매상' 유시민씨의 오래된 이 책은 경제학이 과학으로 취급받기 시작한 시대부터 현대까지 명망을 드날린 경제학자와 그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복잡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어설프지 않게 중요 인물과 사상을 잘 정리해 놓은 것이 우등생이 기말고사를 위해 만들어 둔 '족보' 같기도 하다.


20여명의 경제학자가 등장하여 각자의 의견과 이론을 풀어놓고 있지만 그다지 머리가 아프지 않은 것은 정리가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에서 정리의 틀거리가 이미 눈에 보인다. 부자를 옹호하는 경제학과 빈민을 옹호하는 경제학이다. 유시민씨는 이 기준으로 '진영'을 나눴고 양 진영의 이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격렬하고 다이내믹한 논쟁을 벌인다. 한 때 대한민국의 간판 토론 프로그램이었던 100분 토론의 사회자를 멋지게 수행한 것도 시청자가 헷갈리지 않도록 진영을 잘 구분해주는 재주 덕분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론들의 희비는 진영의 적대성만큼이나 극명하게 드러났다. 소련 연방의 붕괴 후 빈민을 위한 경제학은 힘을 잃었다. 토머스 모어와 마르크스는 일찌감치 밀려났으며 로버트 오웬, 생 시몽, 샤를 푸리에는 공상가가 되었다. 노동자의 편이었던 윌리엄 톰슨과 토마스 호지스킨은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부자, 즉 자본가들을 옹호하는 진영은 자유방임주의를 거쳐 신고전학파, 신자유주의 따위로 포장을 바꾸면서 절대적이 사상이 되었다. '일 하지 않는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빈곤한 노예의 철학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한 철학 아니겠는가.


책을 덮고 나면 빈민을 위한 경제학이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는 현실에 – 빈민에 가까운 한 사람으로서 – 기가 빠진다. 살아남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없다. 게다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부자의 경제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비겁함을 동반해야 한다. 그나마 아직 모든 창과 문을 닫고 자본주의의 암흑 속으로 침전할 것까지는 없다는 유시민씨의 한마디에 위로를 받는다.


마르크스에게 '종교적 숭배'와 '십자가 처형'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에게도 일방적인 칭송이나 비난은 합당치 않다.


일방적 칭송으로 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에 대한, 표독한 자본가에 대한, 그 자본가의 도구가 된 사회에 대한 적절한 비난이다. 어떤 구멍이든 머리와 어깨만 들어가면 몸뚱이가 빠져나갈 수 있는 법이다. 모든 창과 문을 닫지 말고 머리와 어깨가 들어갈만한 비판적 사유의 공간을 마련해둘 일이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