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생각을 주는 말과 글

나의 존엄성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분노하라'

김성열 2014. 3. 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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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도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한국어판 출간에 부친 인터뷰 中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몰지각한 짓이다. 화를 내는 대신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이성적 사고는 화를 누그러뜨릴 뿐만 아니라 판단력과 분석력을 향상시켜 개인의 발전을 가능케한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인물로 좋은 평가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어떤 이의 이성적 사고 수준은 그 사람의 교양과 품위의 수준과 동일하며 이는 곧 한 사회의 교양과 품위 수준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사안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이나 무분별한 악감정의 표출은 사회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지금의 풍족한, 앞으로는 더 풍족할 이 세상은 인류가 오랜 시간동안 분투한 결과다. 정치체제나 시장체제는 수백년, 수천년의 실험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체제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불과 몇 세기 전과도 확연히 비교되는 양적, 질적 풍요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는 소통을 창구를 개방하고 체제 발전에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공정함과 평등함 역시 예전과 비할 바 없는 수준으로 확보하였다.


물론 지금의 체제가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변화와 혁신을 필두로 하여 더 나은 체제로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대응과 지성적 통찰로 문제 해결에 일조하기는커녕 체제에 대한 비판과 비난만을 일삼는 불평주의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의 게으름과 부족한 열정을 탓하지 않은 채 열등감에 가득 차 분노의 확산을 꾀한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남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억지가 그들의 유일한 동기다. 이들은 패배주의자라고 불리우며 어떤 형태의 사회에서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예는 역사에서 찾기 힘들다. 체제의 형태와는 무관하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은 패배주의자가 아닌 이성을 갖춘 실천자에게 주어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지금의 체제가 주는 인생의 성공을 향해 가라고 충고한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지만 공정함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몰락하는 패자 또한 없다고 안심시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모난 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가이드를 한다. 모난 돌이 되어서 정을 맞는 일이야말로 비효율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상은 행복과 성공을 얘기하며 그것을 실현한 영웅들을 앞세운다. 사람들은 그 영웅들의 긍정과 열정, 이성과 지성을 흠모하고 따른다. 스스로 나서서 영웅들의 행복을 모사하려 드는 것이다. 나의 감정은 온데간데 없고 타인의 이성과 지성을 흉내낸다. 존엄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성공과 행복이 절대 선이며 그것의 달성을 방해하는 것들은 악으로 취급 받는다. 지금의 세상에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은 모난 돌에 지나지 않으며 이성이야 말로 성공을 위한 필수요소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화내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세상이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정확히 말하면 체제의 상부에서 그 권위와 권력을 누리거나 그것들에 기생하는 자들은 체제가 유지되길 바란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금 이대로 체제를 용인하고 수긍하길 바란다. 하지만 외견상 열린 체제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 부조리한 것까지 모두 용인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부조리한 것, 옳지 않은 것, 공정하지 않은 것에 화를 낸다. 체제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 체제에 기생하는 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대신 체제가 주는 달콤함을 과대포장하여 사람들을 선동한다. 성공, 긍정, 행복, 풍요 따위가 긍정, 열정, 이성, 지성의 열매라고 떠든다. 그리고 '화'라는 감정은 행복과 성공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한다.


한발 더 나가 세상은 화를 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부류로 몰아간다. 시청광장에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기업 빌딩 앞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팔뚝을 치켜 올리며 화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사회의 안전과 발전을 해치는 부류로 여긴다. 그 사람들이 화난 이유가 자신들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체제 안에서의 권위와 권력을 누리고 기생하기 위해 화난 사람들을 패배주의자, 불평주의자로 낙인 찍는다.



그래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고 외친다. 자신의 존엄성과 그 존엄성을 세울 수 있는 자리와 그것들로 시작하는 행복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이성과 지성의 인위성을 생각하면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순수하다. 즐거우면 웃고,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야 한다. 화가 나면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화를 내지 말라고 충고한다. 긍정으로 살라고, 화를 다스리라고 한다. 나의 감정 중에 유독 화에 대해서만 관용하지 않는다. 이성을 앞세움으로써 '화'라는 감정을 저열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는 개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깨달으라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이 규정한 행복을 추구하려면 세상이 정해준 룰을 따라야 한다. 내가 행복한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지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정한 행복을 복제하려고만 드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행복이 아니라 정량적으로 계측할 수 있는 사회적 행복의 일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화내는 것은 다른 이의 분노를 복제한 것이 아니라 올곧은 나의 감정이다. 그런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내가 존재한다는 말과 다름 없다. 반대로 나의 감정을 세상이 정한 무엇으로 치환하려는 것은 나를 세상이 원하는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없어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면 먼저 '나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화를 내거나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분노는 패배주의자나 불평주의자의 분노가 아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분노다. 이런 당연한 분노조차 하지 않는 우리가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스테판 에셀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행복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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