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삶과 사람

우리를 환자로 만드는 힐링

김성열 2014. 2. 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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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 필요해

예전보다는 그 열기가 식은 듯 하지만 힐링은 여전히 '먹히는' 키워드다. 상처 입고 지친 사람들을 치유하고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대중들이 갖는 '힐링'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이제 갓 사회에 진출한, 또는 진출을 앞두고 있는 20대와 30대에게 힐링이라는 단어는 제대로 먹혔다.


평생 직장은 커녕 취직 자체가 어렵고, 어렵사리 취직을 해도 미래를 쉽게 보장할 수가 없다. 사회 생활의 시작과 유지를 위한 경쟁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 같은' 상황이다. 아직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젊은 세대는 다른 세대와의 대결 뿐만 아니라 같은 세대의 구성원끼리의 경쟁으로 인한 위기감과 불안감, 피로감에 시달린다. 


모두가 환자?

그렇게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힐링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당연한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 힐링이라는 말이 우리를 치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아프게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힐링이라는 키워드는 그 존재 이유를 얻기 위해서는 대중은 아파야 한다. 힐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이란 치유가 필요한 환자인 것이다. "너는 상처 받았어. 그러니까 치유가 필요해. 내가 치유해줄께"라는 간단한 공식이다.


사람이 살면서 내가 아닌 타자와 부대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부대끼다 보면 상처도 입고 상처도 주고 하는게 당연하다. 그렇게 부대낌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해 가면서 사는 것이다. 이제 막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활동량이 커지고 있는 20대와 30대에게 나와 타자(他者) 사이의 부대낌은 피할 수 없는 낯섦이다. 그런 낯섦 없이는 세상에 나설 수 없고 성숙해질 수 없으며,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도 없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힐링

'힐링'이라는 키워드의 문제는 젊은 시절에 자연스레 겪고 지나야 하는 낯섦과 부대낌 마저도 치유의 대상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아픔을 감래하고 부대낌을 받아들여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 '환자'라는 낙인부터 찍어버리니 오히려 더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기껏 치유라는 말하는 것이 너의 의지는 아니겠지만 세상은 너의 맘대로 되지 않으니 (게다가 너는 치유가 필요한 환자니까)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정도다. 이게 무슨 치유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라는 얘기 밖에 안된다. 이건 치유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의 지배논리다.


유시민 전복지부장관은 그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힐링이 아닌 스탠딩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지치고 힘들어서다. 하지만 상처 받았다는 확인을 통해 일어설 용기조차 꺾어버리는 데는 '힐링'이라는 키워드가 큰 몫을 했다. 


힐링은 진짜 아플 때

40대 이상은 -아직 다 안살아 봐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20/30대에게 필요한 것은 환자라는 딱지와 위로와 치유라는 감성지향적 처방전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쳐서 무릎 꿇었을 때 허리를 감아 일으켜주는 도움이며  힘들겠지만 앞으로 전진하라는 격려다.


원래 세상에 나서면 아픈게 정상이다. 이성 하나만 사랑해도 아픈게 사람인데 이 넓은 세상에 나왔으니 안 아플리 있겠는가. 이제 힐링이라는 말은 서랍장에 넣어두자. 대신에 겁은 나지만 한걸음을 딪기 위해 일어서는 용기를 갖자. 아파야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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