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어리고 소소한 생각

대통령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성열 2014. 11. 24. 15:22
728x90



대통령(존함은 생략한다)이 대선 때 걸었던 공약들이 늦가을 옥수수대처럼 우스스 쓰러져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호 사고 때 껌뻑거리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했던 말들이 배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 가라 앉는 것을 보면서, 결코 나는 속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반전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말들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반전의 반전이다) 하지만 궁금함은 있다. '저 분은 왜 거짓말을 하실까?'라는 궁금함 말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배웠다. (물론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개념도 있긴 하다. 하지만 대통령의 거짓말들은 선의나 철학과는 하등 관계 없으니 접어두자.)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런 기초적면서 보편적인 상식을 모를 리 없다. 분명 '나쁜 사람'과 한 나라의 대통령은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그런데 왜 나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거짓말을 할까? 이것이 내 의문의 시작이다.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다. 아마 별 일 없는 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대통령도 생각할 것이다. 거짓말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랬다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상식은 나와 대통령이 '함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거짓말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대통령도 알고 있으니 대통령이 거짓말을 할 확률은 아주 낮다. 어떤 대통령이 대놓고 자신을 거짓말쟁이 나쁜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겠는가? 그렇다면 (혼자 독박 쓰기는 좀 부담되니 같이 가자) 대통령의 많은 말과 약속들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통령 사이에는 거짓말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증세 없는 복지'을 하겠다고 했는데 (그거 할려고 대통령 한다고 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복지 없는 증세'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증세 없는 복지','꼼꼼히 따져보았다는 가능성'은 거짓말이다. 세월호 사건 때 진도까지 내려가서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약속이 안지켜지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던 말, 유가족에게 언제라도 찾아오라던 말, 철저하게 원인규명을 할 것이라던 말도 지금에 와서 보면 거짓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거짓말을 한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나쁜 사람이라는 평판을 불러올 거짓말을, 그것도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기꾼이 그렇다고들 하지만 대통령과 사기꾼 따위를 엮는 것은 저열한 비난이다. 사기꾼은 아예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거짓말을 한다. 대통령 (또는 대통령이 될 사람)이 국민들을 속여서 남는게 뭐가 있다고 사기를 치겠는가. 게다가 사기꾼이야 등쳐먹을 당사자만 속이면 그만이지만 대통령이 거짓말로 몇몇 국민들을 등쳐먹을 일이 어디 있으며, 수천만개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데 몇몇만 속이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자신의 거짓말을 거짓말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 될까? 하지만 이 역시 이해가 안가긴 마찬가지다. 거짓말과 참말을 구별하는 데 박사학위가 필요하길 한가, 진리감별사 자격증이 필요하길 한가? 말에 대한 행위의 결과가 있으면 직관만으로도 얼마든지 거짓과 참은 구별할 수 있다. 대선 공약이나 특정한 약속처럼 실행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구분하기가 더 쉽다. 그냥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을 꺼낸 당사자에게도 거짓이다.


나는 대통령을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일반 국민들과 다른 사고 체계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통령이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들 양말 신고 신발 신을 때 신발 신고 양말 신는' 그런 괴상하고 야릇한 사고 체계로 만물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나의 진심이다!) 쭉 봐와서 알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잖는가? 그러니 대통령이 거짓말에 대한 별스러운 개념 정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미궁, 에코에게 길을 묻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대통령이 왜 거짓말을 하는 지 알 길이 없어졌다. 마치 아리아드네 공주가 준 실타래로 겨울 목도리를 떠버리고 다이달로스의 미궁에는 맨 몸으로 들어간 (바보천치 같은) 테세우스처럼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테세우스는 목도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변기에 걸터 앉아 (변기에 걸터 앉은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으리라) 문득 펼쳐본 책에서 답을 찾았다. 쾌변의 희열과 함께 (아, 변기에 걸터 앉은 이유를 말해 버렸다) 궁금증이 해소되는 쾌감이 온 몸을 감쌌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경우에 갖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한다. 선거 운동중에는 으레 거짓말이 남발된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종합하고 단순화하기 위해, 또는 일을 더욱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며, 때로는 악의를 품고 더러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바로 이 신념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가장 비극적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 처지에서 보면 실제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정보가 부족한 탓에 참이 아닌 것을 말할 뿐이다). 어쨌거나 거짓말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며 그렇게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면,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러워질 때가 더러는 있지 아니한가?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中


참 말이 아니라고 다 거짓말은 아니다

참이 아닌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거짓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거짓말이 전부가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됐다. 의문이 풀린 것만도 기쁜 일이다. 어떤 이가 자신의 신념으로 인한 비극 속에 산다고 하여도 그냥 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는게 어른(成人)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아쉬움이 있다면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러워지는 그 때에 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 또한 어떤가. 언젠가는 그런 이를 만나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또 하루를 살아본다. 1187일 남았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