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연애

짝사랑과 외사랑

김성열 2014. 8. 1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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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 천장호에서, 나희덕 (전문)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 서시, 이성복 (부분)





짝사랑외사랑은 구분할 수 있을까? 위의 두 시에서 어느 것이 짝사랑이고 외사랑일까? 사람들 이야기로는 외사랑은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혼자 사랑이고, 짝사랑은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상대가 모르는 혼자 사랑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알기론, 예전에는 이와 반대의 뜻이었다.


사실 두 말을 사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전에는 '외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짝사랑'의 같은 말에 '외짝사랑', '외쪽사랑'이라는 것이 있다. 짐작컨데 '외사랑'은 '외짝사랑'이나 '외쪽사랑'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느 인터넷 사전에서 예문으로 나오는 '사랑  즐김   하 알오샤 돌녀 사랑시소'라는 옛 시의 구절을 보면 '짝사랑'과 '외'가 한 문장에서 같이 맥락으로 쓰인다. 그러니 짝사랑과 외사랑을 사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래도 짝사랑, 외사랑의 '한쪽만 상대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원래의 뜻은 여전히 단단하다. 그 서글픔과 아련함의 감정은 세대가 지나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반복되기에 (짝사랑 한번 안해본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짝사랑이든 외사랑이든 '혼자 하는 사랑'이라는 뜻이 쉽게 없어지거나 바뀌거나 하진 않을 터이다.


말의 원래 뜻이 어떻든 혼자하는 사랑의 종류를 굳이 나눈다면 사랑의 대상이 나의 사랑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나누는 것도 - 겪어본 사람이라면 - 꽤 공감이 가는 얘기고 그 공감은 시대를 초월한다. 짝사랑, 외사랑은 수 많은 시인들이, 수 많은 작가들이, 수 많은 음악가들이, 수 많은 화가들이 시를 쓰고,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사랑의 색과 향기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마다 제 각각이지만 그 정서의 보편성은 사람과 시간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랑은 같이 두 사람이 꼭 껴안고 있는 것이다. 물 한방울 샐 틈도 없이 서로에게 밀착하는 것이다. 그 틈에는 나이도, 성별도, 국경도, 돈도, 직업도, 학력도, 부모님의 간섭도, 친구의 조언도, 불확실한 미래도, 불편하고 남루한 현실도 결코 끼어들지 못한다. 그렇게 내 밖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내 안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게 보면 혼자 하는 짝사랑, 외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애뜻한 바라봄과 간절한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은 맞사랑(서로 주고 받는 사랑)만큼이나 틈이 없어서다. 혼자 하는 사랑이나 서로 하는 사랑이나 틈이 없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서로의 틈을 되는대로 벌려 돈, 욕정, 안락함, 과시, 우월함 따위의 온갖 삿된 것들을 집어넣는 데 여념이 없는 헛사랑보다는 짝사랑이, 외사랑이 훨씬 사랑답다. 


짝사랑, 외사랑은 젊은 시절의 추억처럼, 어른이 되는 과정처럼 여겨진다. 되지 않을 성 싶은 것에서 지레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어른의 자격이고 어리석은 경험을 두번 하지 않는 것이 진중한 어른의 미덕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씩 버려가는 댓가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허물을 벗듯이 사랑을 버려서 어른이 되고, 그렇게 짝사랑조차 못하게 된 어른이 세상을 꾸린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이렇게나 각박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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