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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기시미 이치로, 다산초당, 2018)

김성열 2019. 1. 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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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기시미 이치로, 다산초당, 2018)


마흔에 접어들 때 특별한 감정이 있진 않았다.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정도였다. 미처 알아채지 못하거나 숨기고 싶은 서글픔이나 설렘이 마음 한 켠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일상에 쉽게 용해되고 만다. 그러다 마흔 하나가 되고 마흔 둘이 되고 마흔 셋이 된다. 나이 먹음도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줄곧 나이를 그렇게 먹어왔던 것 같다.


특별할 것 없었던 40대가 부담스럽게 다가온 것은 나이 50까지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다. 이제 지나온 40대의 절반만 살면 쉰이다. 전에 그랬듯이 나이듦을 자연스러운 삶의 진행으로 받아들인들 누가 뭐라 하겠냐만, 그래도 사뭇 느낌이 다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만큼이나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더 크게 느껴져서다.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한 기시미 이치로의 <마흔에게>는 나의 그런 물음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기시미 이치로는 40대에 들어 마주하게 될 노화를 퇴화가 아닌 변화로 받아들이길 충고한다. 그리고 성공을 행복과 등치 시키지 않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어찌 보면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뻔한 얘기지만 기시미 이치로는 그것을 '늙어가는 용기'라고 말한다.


기시미 이치로는 나이가 들면 공동체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어른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른이 되는 일 역시 '늙어가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성공에 집착하는 것도 중심에 머물길 원하는 것이고, 늙어감을 퇴화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심에서 멀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가 마흔에 접어드는 이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어른이 되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의 물음으로 되돌아갔을 때, 과연 나는 어른으로 40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아직은 늙어가는 용기가 부족해서일 것이다. 입버릇처럼 되뇌고 생각하던 '난 아직 늙지 않았어'라는 말을 줄이는 데서 늙어가는 용기를 찾아야 할 때다. 늙어가는 용기가 없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할 일이다.


무슨 일이든 해보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해내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하지 못한다"는 현실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곧 할 거야"라는 가능성 속에서만 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못합니다.

 - <마흔에게>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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