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문학동네, 2004)


삶의 길목 길목에 섰을 때 우리의 눈과 몸은 밝고 따뜻한 양지를 향한다. 혹여 몸은 응달에 머물고 있을지언정 양지를 향한 관심과 욕망은 시들지 않는다. 즐거움, 기쁨, 우월함, 명랑, 쾌활, 호의, 환희 따위의 좋은 감정을 향함은 본능에 가깝다. 세상은 그런 좋은 감정들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절대적인 이유는 없지만, 그늘진 감정보다 감각적으로 끌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들은 삶의 지향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김승욱의 이야기는 그런 지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늘에 웅크리고 않아서 갖은 불편한 감정들을 들춰낸다. 자괴감, 미움, 절망, 고독, 불안, 열등, 비탄, 시기, 멸시 같은 감정들이 그의 이야기의 결을 이룬다. 그렇다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드라마틱한 구성 안에서 우울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무딘 손톱으로 제 피부를 거듭해 긁어 상처를 무르익게하듯 묵묵하게 그늘 안의 감정들을 나열하고 이어간다.


양지를 바라보는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나 이죽거림은 없다. 특별한 누군가에게 하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불편하다. 그 어떤 삶이라도 모퉁이마다 그늘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인지하게끔 최면을 거는 듯한 그의 이야기에 귀와 눈이 쏠리는 것을 참기가 어렵다. 더욱 불편한 것은 화자(話者)와의 감정 공유는 책을 덮으면 그만이지만 내 감정의 인지는 책을 덮는다고 해서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절망이란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논리가 꺾이고 지성이 힘을 잃고 최악의 감정, 예컨대 증오조차 사라져버리는 저 마구 쓰리기만 한 감촉의 시간, 도회를 떠난다고 해도 이미 갈 곳은 없고 죽음으로써도 해결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아서 불더미 속에 싸이기나 한 듯이 안절부절못하는 사나이여, 유희의 기록이라도 하라. -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절망 앞에서는 죽음이라는 도피마저도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절망의 진수이기 때문이다. 죽음마저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목을 내어놓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삶의 외길에서 그 절망들이 얼마나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않다면 삿된 희망을 경외롭게 바라보진 않으리라.



'...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 무진기행


사랑은 수많은 감정의 결정체이자 근원이다. 질투, 탐욕, 시기, 열등감, 환희, 비탄, 기쁨, 쾌락 이 모든 것들이 사랑에서 나오며 그것들이 모여 사랑을 이룬다.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으므로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 사랑은 과잉된 감정들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는 충동에 가깝다. 충동은 계획적이지도, 이성적이도 않다. 그래서 항상 부자연스럽다.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싼는 것이 사랑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우연에서 기인한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과잉이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다울리 없으며, 그 우연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끝장이 나기 마련이다.



얘 얘, 더럽다, 더러워, K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쓴다. 웃음이 아니라 야릇한 덩어리다. 그 덩어리가 K의 목구멍을 탁 틀어 막는다.

"요것들 봐라, 요것들 봐라, 요오것들 봐라....." - 싸게 사들이기


자신의 저열함을 스스로 확인한다 해도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내가 나를 모른척 하는 것만큼, 그마저도 어려우면 나를 합리화시키는 것만큼 손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저열함을 발견한 덕분에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나의 저열함이 드러나는 일은, 남에게는 숨길 수 있어도 자신에게 숨길 수가 없다. 그 때의 낯뜨거움과 모멸감은 다른 누구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 차나 한잔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불확신,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불안을 만든다. 불안은 불편한 감정임이 확실하지만, 회피와 도피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노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불확신에서 기인한 불안은 더욱 불편하다. 나를 회피하거나 나에게서 도피할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노력을 들인다고 해도 노력의 대상과 주체가 동일하다는 어색함을 벗어나질 못한다. 나를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나의 선택과는 상관 없이 이렇게 정해져버린 나를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성공과 영광의 이유를 자신에게 돌리려다 보니 만들어낸 그럴싸한 미사어구.



나는 우리 염소를 생각해본다. 그놈은 무척 힘이 세었다. 그놈이 죽어버리니까 우리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어쨌든 누나를 힘세게 만들어주었다. - 염소는 힘이 세다


무기력은 끊임없이 열등감을 자극한다. 그 열등감이 불편할 때는 나의 무기력을 탓할 게 아니라 세상탓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힘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힘이 센 염소의 죽음에 더 큰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다. 죄책감을 굳이 갖을 필요 없다. 나의 무기력은 내가 스스로 인정했으며, 나아진 상황을 나의 공덕으로 돌리지 않으면 파렴치한을 면할 수 있다. 물론 무기력의 굴레 안에 계속 나를 둠으로써 댓가를 치뤄야 한다. 한번 도망을 하면 계속 도망을 할거라는 싸구려 경구가 이렇게 잘 들어맞을 때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의혹과 질투의 고통은 '있지 않다'는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다. - 서울의 달빛 0章


'있기' 때문에 의혹과 질투가 생겨서 불편하다면 '있지 않은' 상황을 원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있지 않음'의 고통이 의혹과 질투의 고통보다 더 클 때는 의혹과 질투를 감래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이 기초적인 합리성 안에서 '있다'의 기쁨은 외면당한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얻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곁에 둔다면, 그 누군가는 결코 관계의 목적이 되진 않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기껏해야 누군가에게 진통제 역할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진통제는 있으면 다행이긴 해도 기쁨이 되지는 못한다. 뻔한 합리성을 사랑, 애정 따위로 포장하며 살고 있는 세상이라서 서글프다.

Posted by 김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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