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어리고 소소한 생각

때로, 기자의 중립은 침묵만큼이나 나쁘다

김성열 2018. 12. 18. 09:41
728x90



때로, 기자의 중립은 침묵만큼이나 나쁘다


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꼽아보자면 진실, 공정, 중립, 객관 같은 것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미디어나 저널리즘에 대해 특별히 공부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추려내기 마련이다. 기사나 뉴스를 통해 세상과의 접점을 많은 부분(거의 대부분) 확보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기사나 뉴스가 최대한 진실하고 공정하며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길 원한다. 그래야 내가 알게 될 세상이 편향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기사로서 말을 하는 기자에게는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요구될 수 밖에 없으며, 기자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고 있음을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를 가진 언론의 최일선 핵심존재로서  보도를 실천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으로부터 언론이 위임 받은 편집-편성권을 공유할 권리를 갖는다.

  ....

2. 공정보도

우리는 뉴스를 보도함에 있어서 진실을 존중하여 정확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며,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한다.


쉽게 말해 진실, 공정, 중립, 객관 같은 요소들은 기사가 갖춰야할 윤리적 스펙이다. 이런 요소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기사는 편향될 수 밖에 없으며 때로는 기사를 읽는 이로 하여금 특정한 의식이나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선동할 수도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진실한 내용을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쓰는 것만으로도 기사의 윤리는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염치를 모르는 가짜 뉴스가 연일 언로(言路)를 질주하고, 노골적으로 편향된 기사가 지면과 뉴스 게시판을 도배하는 요즘과 같은 때에는 '기본만 해도' 기자의 윤리를 준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간혹 기자들을 향해 '기레기', '기발놈' 소리가 나는 것은 최소한의 윤리적 스펙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기사의 윤리적 스펙은 기사를 쓰거나 취재를 할 때 고려해야할 것들이다. 이보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충족'과 '진실을 알릴 의무'라는 기자의 소명이다. 이 소명이 제대로 작동을 한 후에야 기사의 윤리적 스펙이 의미를 갖게 된다. 


기자가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의 소명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사람들은 특정 정보로부터 차단이 된다. 세상 모든 일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앎과 모름은 여론의 방향이나 사회적 경향을 (누군가의 편익을 위해) 왜곡할 수도 있다. 예전 독재정부가 보도통제를 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소명만큼 기자의 사회적 중요성을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진실을 알릴 의무'는 기사의 윤리적 스펙인 진실함과도 맞닿는 소명이다. 누군가가 진실을 감추려 했을 때 나서서 알리는 것이 기자의 사회적 소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남모르게 자선을 펼치지 않은 바에야, 진실을 감추려 하는 사람은 그 진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난처해지고 곤란해짐에 틀림없다. 그러한 진실을 감추는 일은 부정이나 부패를 동반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게 되고 사회적 공정성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사회의 공정함을 유지한다는 측면만 보더라도 '진실을 알릴 의무'는 기자의 소명으로서 큰 가치가 있다.


이 두 개의 소명을 하나로 합쳐 '국민이 알 권리가 있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기자의 소명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국민이 알 권리가 있는 것은 당연히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따라서 기자의 두 가지 소명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침묵하는 기자'가 됨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기자의 침묵은 끊이지 않고 발견된다. 대기업의 비리나 범죄에 대해 다루지 않거나 (많은 언론사들이 어떤 대기업에 대해서 특히 그렇다), 언론인 또는 언론사 당사자에게 불리한 기사거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어떤 신문사는 자사의 기업주가 얽혀 있는 스캔들 건에 대해서 유독 기사가 드물다), 이념이 반대되는 진영의 일에 대해 눈감아버리는 경우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는 '권력의 감시견'을 자처한 언론계의 구성원으로서 기자의 존재의미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다. 기자는 '서비스의 대상'인 일반인으로부터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자괴감, 부끄러움 같은 불편한 감정을 감수해야만 한다.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 수준도 높아지고 정보의 통로가 다양해져 침묵이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모르쇠로 넘어가기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어떤 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기자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상황일 수도 있다. 열심히 취재를 해도 데스크에서 짤릴 수도 있고, 몸담고 있는 조직의 편익과 유불리에 따라 침묵을 강요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욕을 덜 먹는 것도 아니다. 기자라는 명찰을 단 이상 '국민의 알 권리 충족'과, '진실을 알릴 의무'를 소명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그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때때로 기자들은 기계적인 중립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판단과 관점의 재료가 될만한 최소한의 평론과 해석은 기사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과 해설을 절제한 채 아주 메마른 사실만 언급하거나, 하더라도 양비론을 들고 나와 불편해보이기 짝이 업는 중립의 스탠스를 취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주식거래 재개에 대해 많은 언론들은 거래가 재개 되었다는 사실만 건조하게 다루었다. 어떤 배경으로 그런 결정이 났는지 심도 있게 다루는 기사도 없었고, 사람들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쟁점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거래가 재개된 '사실'만을 언급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자유한국당이 '유치원3법'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며 여당이 발의한 유치원3법의 국회 통과에 제동을 건 일에 대해서도 많은 언론사들의 여당과 야당의 대결국면으로 해설하는 경향이 많았다. 유치원3법이 갖는 의미를 고려하면 여당과 야당이 제시하는 법안이 각각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인 충돌지점은 무엇인지, 법안의 표류 책임이 어디 있는지 같은 것들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런 세밀한 상황 설명 보다는 여당과 야당이 구태의연한 정쟁을 하여 국민들만 손해본다는 양비론으로 마무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사실만을 건조하게 다루는 기사도 분명 필요가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윤리적 스펙만 내세워 기자의 소명을 다한 듯 구는 것은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는 언론의 기능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기자로서의 소명과 기사의 윤리적 스펙을 욕먹지 않는 수준으로만 구비한 기사가 무슨 수로 사회적 의제를 이끌어내겠는가? 그렇게 양비론으로 적당히 비평해 놓아서야 읽는 이가 어떻게 올바른 관점을 갖겠는가? 길이 잘못 표시된 지도는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지만 그래도 도달할 지점은 있다. 하지만 방향의 표시 없이 최소한의 길만 그려넣은 지도는 아예 목표 지점이 없이 떠돌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기자의 무성의한 기계적 중립이나 성의 없는 양비론은 침묵만큼이나 나쁘다.    


퓰리처는 기자의 소명에 대해 "단순히 뉴스를 인쇄하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철저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약탈적인 금권 정치든 약탈적 빈곤이든 잘못된 것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기자는 안전한 참관인(Observer)가 아니라 목숨을 건 사관(史官)이어야만 한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