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삶과 사람

힘들면 울어라. 그래야 사람이다.

김성열 2014. 7. 2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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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울 줄 아는 동물이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반갑거나, 힘들거나 했을 때, 그 상황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세게 다가와 눈물샘을 툭 치면 운다. 우는 것만큼 솔직한 감정 표현도 드물다. 하하하~ 소리만 적당히 내면 웃음은 가장할 수도 있고 그 소리를 참으면 웃음을 참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는 것은 흐느낌과 눈물을 모두 참아야 감출 수 있고 그 둘을 모두 보여야 가장할 수 있다. 게다가 울음은 참아봤자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속에 남는다. 웃음은 참아서 흘려 보낼 수 있지만 울음은 참아서 흘려보낼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맘껏 울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남자라는 이유로, 성인이라는 이유로, 좌절금지라는 이유로, 희망이라는 이유로, 우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특히 힘들어도 울지 않는 태도는 거의 교양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람들에게 강조된다. 비단 어른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까지 그러한 태도를 요구할 정도이니 (사회적 심성과 태도의 고양이라는 훈육의 형태로) 우리 사회가 약자에 대해 얼마나 관대하지 못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등급

위 사진 속 사내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저 사내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힘들 때 우느냐 울지 않느냐로 야멸차게 사람의 등급을 나눈다. 솔직히 감정을 표현하면 삼류가 되고 그 감정을 참고 인내하는 것을 넘어서 그 감정에 적합하지 않은 (정반대의) 표현을 하면 일류다. 서슬 퍼렇게 들리지만 일류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실천해야할 로망으로 보이기 쉽상이다.


희망을 갖고 인내하며 지금의 고통과 역경이 언젠가 너를 웃음짓게 할 것이니 절망하지 말라는 뜻의 은유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하게 등급까지 나누며 일류를 강조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치켜든 것을 보면 은유가 아니라 직설이다. 더구나 사진 속의 사내가 말하는 포인트는 인내와 희망이 아니라 '일류'다. 힘들 때 울지 않고 웃는 것이 바로 일류가 되기 위한 여러 요건 중에 하나라는 얘기다.


성공해야 일류

이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풍조에 지나지 않는다. 적당한 수사와 표현으로 겉포장을 잘 해서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이 마치 보편적 진리인척 미화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성공의 미화다. 삼류에게 희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을 일류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만든 달짝지근한 말장난일 뿐이다.


당장 처자식을 데리고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이 실실 웃으면서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그 말을 신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말하는 성공을 통해 '일류 인간'이 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그 말은 명언이 된다. 성공한 그 자신은 스스로 증인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에 한해서일 뿐이지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나 성공의 열쇠 따위가 될 수는 없다.



힘들 때 웃으면 미친 것

힘들 때 우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 애인이 이별을 고해도 웃고, 교통사고를 당해서 하반신 마비가 왔는데도 웃고, 잘못 선 빚보증 때문에 집안이 경매 딱지로 도배되어도 '진짜로' 웃는 사람이 있다면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펑펑 우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은 그냥 미친 것이다. 일류가 되기 위해 정상적인 감정의 표현을 접어두고 미친 사람의 행태를 보이라는 것은 너무 과하다.


사람이 담아 둘 수 있는 감정은 한계가 있다. 감정을 쌓고 또 쌓아 포화 상태가 되면 다른 감정을 수용하기가 어려워진다. 쌓인 감정을 적당히 풀어버려야 또다른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희망, 긍정, 낙천, 용기, 좌절금지 따위가 제아무리 인생을 바꿔놓는 열쇠라 해도 마음 속에 공간이 없으면 들어가질 못한다. 


힘들면 울어라

그러니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한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으면 그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줄 긍정적인 감정들도 들어설 곳이 없어진다. 남 앞에서 우는 것이 볼썽 사납게 느껴지거나 창피하면 혼자서 울면 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다. 오히려 나를 제일 잘 아는 내 앞에서 펑펑 우는 것이 일류에 대한 강박이나 남자다움, 성인다움, 가장의 위신 따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감정을 풀어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일류, 이류, 삼류 따위의 되지도 않는 등급 나누기에 주눅들지 말 일이고 단지 성공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돼지고기처럼 등급으로 나눠버리는 오만함에 기죽지 말 일이며 힘들어서 운다는 이유로 삼류 인간 취급하는 것에 긍정하지 말 일이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의미 찾기는 충분하다. 일류가 되진 못할지언정 힘들 때 우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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