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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자의 슬픔 - 수저의 대물림 III

김성열 2018. 6. 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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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자의 슬픔 - 수저의 대물림


III. 이 수저가 너의 수저냐?

‘흙수저’라는 말이 불편한 사람도 분명 있다. 왜 아버지들을 수저의 구성 물질 따위로 구분해야 하냐고 항변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있는 것을 없다고 정신승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직장인의 92%가 ‘수저계급론’을 현실이라고 답했다. 수저계급론을 부정한 8%의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론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런 현실이 싫어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설문에서 자신을 ‘흙수저’라고 답한 사람이 66.5%였고, 노력만으로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다고 답한 사람은 8.8%에 그쳤다. 그저 보통 사람들이 보는 현실이 이렇다.


이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감각의 오류일 수도, 상대적인 시각의 차이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이럴 때는 실제 데이터를 통해 현실과 감각의 차이를 메울 수 있다.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이 얼마나 될까? 2017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임금근로 일자리별 소득 분포 분석”을 보면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이 329만원이다. 이 중에 40대의 평균 소득은 383만원이다. 40대의 소득 수준은 전체 평균보다는 높다. 여기까지만 보면 40대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값을 그냥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평균이란 것은 최상위와 최하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표본을 적용한 값이다. 좀 더 현실적인 값은 중위값(중앙값)에서 나온다. 임금근로자의 중위소득은 고작해야 241만원이다. 40대도 중위값은 평균값에 이르지 못한다. 40대의 중위소득은 300만원이다. 감각으로 받아들인 현실이 데이터로 입증이 되었다. 많은 40대 남자들이 한 달에 300만원으로 기초 생활비 쓰고, 주택 대출금 값고, 자녀들 교육까지 시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아내가 같이 버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버는 이유는 애들 학원비라도 충당하려는 목적이다. 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빠듯하거나 모자라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 입장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자존심을 넘어서 자존감에 흠집을 낼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라고 말했다. 자녀 뒷바라지 하나 마음껏 못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면 세상으로부터 삶을 모욕 당했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재산이 좀 없어서, 버는 것이 많지 않아서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것은 참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자존감이 무너지기 쉬워진다.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많은 흙수저 아버지들을 방관자로, 무능력자로 몰아간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하지 그랬어.”라고 입바른 소리 할 것이 아니다. 공부 머리가 좋은 순서대로 잘 사는 시스템은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올바르다 말하긴  힘들거니와, 사람은 기계나 로봇이 아니다. 그리고 인생은 산수가 아니다. 교육을 이미 경험한 40대 남자들은 들이부은 만큼 똑 떨어지게 산출값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40대 남자들이 교육받던 시대와는 다르다. 하지만 결국은 '줄 세우기'를 위한 시스템이라는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줄의 중간쯤에나 겨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녀에게 투영될 때 슬픈 감정은 피하기가 어렵다.


이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혁명적인' 해결 방법은 없다. 이미 시스템은 견고하며 빠져나올 명분도, 빠져나왔을 때의 대안도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시스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시스템이 40대 남자 본인에게 적용된다면 과감하게 뿌리치고 나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40대 남자 자신이 아니라 그 자녀에게 걸린 문제라서 함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어렵다. 내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뿌듯하다는 어른들 말이 있다. 논 농사를 짓지 않아도 자식 키우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안다. 입에 물려준 것을 아이가 실하게 씹어 넘길 때 기분은 부모라면 다 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내 자식 입에 밥 넣어주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속상하다는 말이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원하는 것을 못해줄 때만큼 비참한 기분이 드는 때가 또 있을까?



40대가 무능해서 그렇게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40대 아버지들은, 그리고 어머니들은 순응하면서 살아온 죄 밖에 없다. 힙합 그룹 배치기의 노래 '아홉수'에서 40대의 심정과 미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구절이 있다. 


폭탄을 때려 맞은 듯해 모두 다 떠안기엔 너무도 버거워 / 이게 나이의 무게인가? 난 이 아무개 이다 내 소개를 하는게 부끄러워 / 왜? 뭐든 해둔게 없어서 늘 결과들의 열매들은 썼어 / 어려서 그랬다는 핑계들은 벌써 너무도 흔해 빠진 이유가 돼버렸어 / 나 딱히 죄지은것 없이 착실하게만 살았는데 / 다 다른 청춘의 끝 문턱에 걸려 허우적 대 / 많이는 바라지도 않아 노력한 만큼만 달라는데 그게 어려운 거니 / 구걸이라도 하듯 두손 벌리면 제 값의 나이는 쳐주는거니 


지금의 아이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지금의 고통을 만들어낸 원인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살면 잘 된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배웠기에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죄가 되거나 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결과가 나쁘다고 믿음조차 죄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시대의 모퉁이마다 수많은 죄인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안한 것도, 무서운 것도 지긋지긋한데, “그게 다 당신들이 잘못해서 그래.”라고 해버리면 우리나라의 40대 아버지들은 스스로 관을 짊어지고 무덤을 파는 일 말고 할 일이 없다. 


지금 처한 상황도 절망이 가득한데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그저 몰인정일 뿐이다. 희망보다 절망이 더 큰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희망을 북돋아야 함이 옳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이해와 동의를 일치시켜야 하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해 받고 인정 받는 것 만으로도 불편한 감정은 잦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절망에 허덕이는 많은 40대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불안은 여전하겠지만 그 불안이 절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불안에 대한 이해와 인정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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