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40대 남자

불안과 반감이 교차하는 자녀 교육

김성열 2018. 6. 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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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경쟁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전문가인 분야가 있다. 바로 교육과 정치다. 교육과 정치 얘기만 나오면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온갖 문제와 해결방법이 쏟아져 나온다. 다만, 교육과 정치를 대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다. 정치는 신념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의견이 상반될 때 대립이 심해진다. 그래서 정치 성향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정치 얘기를 하다 보면 금방 논쟁이 되고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긴다. 삼삼오오 모인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리는 이유다. 이에 반해 교육만큼은 의견 일치가 잘 되는 편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은 개인의 신념이나 관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경쟁과 효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육 경쟁에서만큼은 최대한 남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 거의 진리에 가깝다. 교육 경쟁에서의 우위가 남 보다 더 좋은 직업과, 더 잘난 배우자와, 더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준다는 경험적 논거 덕분에 교육은 경쟁의 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비용의 투입이 불가피하며, 쏟아 부은 비용만큼 효율이 생긴다는 공식이 절대적이다. 이 공식에 따라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교육에 돈을 쏟아 붓는다. 이를 두고 유시민 작가는 학부모들의 교육 투자를 두고 ‘군비경쟁’과 비슷하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열외나 예외는 거의 없다. 자녀 교육에 투자를 아끼거나 주저하는 학부모는 자녀에게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어느날 아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어떤 '학부모'와의 전화 통화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전화를 하면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가 공부를 어떻게, 얼마나 하는지 캐묻기 일쑤인데다가, 학원을 보내지 않는 우리 부부의 교육 방침을 한심한 듯이 얘기해서 기분이 무척 상한다고 했다. 이런 식의 평가는 엄마들의 모임에서도 간혹 핀잔 비슷하게 듣는 경우가 있고 그 때마다 자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엄마로 취급당하는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교육 투자를 자녀가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라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는 풍조가 은근히 느껴진다.  이런 분위기는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자녀 교육에 열을 올리게 만든다. 



자녀 교육을 위한 방관자

자녀를 둔 40대 남자의 대부분은 학부모다. 자녀의 교육을 뒷받침하고 밀어주어야 하는 주체다. 하지만 말이 학부모지 40대 남자들이 자녀 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녀 교육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이 크다. 총리는 내치, 대통령을 외치를 담당하는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는 구경꾼 신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버지를 단순한 방관자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녀의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 아버지가 큰 책임을 진다. 그 점에서만큼은 아버지의 역할과 중요성이 크다.  군비경쟁과 같은 풍토에서는 얼마나 쏟아 붓느냐가 우열을 가리는 척도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비용을 대는 것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어머니도 비용 부분의 책임을 공동으로 짊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어머니들은 ‘반찬값이나 벌려고’ 일을 했지만 요즘 어머니들은 ‘학원비 내려고’ 일을 한다. 하지만 자녀 교육의 비용에 관해서는 여전히 아버지가 1순위의 책임을 진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어주는 것이 ‘자녀 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참된 자세’가 된지 오래다. 심지어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는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는 말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가게 된다. “희정이는 왜 안들어와? 학원 끝나는 시간 지나지 않았어?” “수학 학원 하나 끊었어. 한 시간 정도 더 있어야 들어올 거야.” “수학 학원은 방학 때 두 달 했잖아?” “그거는 이번 학기 준비하는 거였고. 희정이 내년에 고등학생이야. 미리 안해놓으면 못 따라가.” “이제 중학교 3학년 시작인데 벌써 고등학교 과정을 배운다고?” “모르는 소리 좀 하지마. 애 수포자 만들거야? 지금 안해 놓으면 인서울 대학은 어림도 없어. 상준이네는 벌써 고등학교 2학년 수업 듣고 있어. 희정이는 지금도 늦었어.” “뭘 그렇게까지…” “애들은 내가 알아서 챙길테니까 당신은 당신 몸이나 챙겨. 담배도 좀 끊고 술도 좀 줄이고.” 


이 정도 대화가 오가면 아버지는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가슴 속에 숨겨둔 자녀에 대한 애정만큼은 우주를 품고도 남는다. 하지만 전쟁터 같은 교육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는 신세다. 그렇게 보면 비용을 대는 것으로 자녀 교육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자녀 교육을 위해 필요한 부모의 경쟁력이나 능력을 묻는 설문에서 ‘경제적 능력’이 1위를 차지한 지는 오래 되었다. 강사전문 취업포털 강사닷컴의 2015년 설문을 보면 모든 연령대의 응답자가 자녀교육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라고 답했다. 특히 40대 응답자의 경우 65.3%가 부모의 경쟁력을 자녀교육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답했다. 다른 연령대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현재 교육 풍토에 만족하든 그렇지 않든, 비용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공식에 40대 부모가 가장 잘 부합하고 있다는 얘기다.


자녀들 교육에서는 투자한 비용만큼 뽑는다는 공식에 대해 학부모들이 100% 확신을 가지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다만, 지금과 같이 비용을 때려 붓는 방식이 현재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최선(最善)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비용을 쏟아 붓는 방식은 무척 간편하다. 또, 비용을 쏟아 부었다는 것만으로 부모의 도리를 했다는 자기합리화까지도 가능하다. 물론 이 프레임은 철저히 부모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부모로서 할 바를 다 했으니 결과가 좋으면 부모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고, 결과가 나쁘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자녀를 탓하면 그만이다. 


무관심을 종용 당하는 아버지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교육 경쟁 결과가 좋으면 자신의 무관심마저 자녀를 위한 일이 된다. 못이긴 척 무관심해져도 별로 잃을 것이 없는 구도인데다가, 자녀의 교육은 아내의 몫이라는 협의되지 않은 역할의 나눔이 아버지들을 자녀 교육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자녀의 삶에 무관심한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40대 아버지들의 자녀들은 아직 스스로 삶을 일굴 수 있을 정도로 자라지도 못했고, 부모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지들도 알고 있다. 무관심해 보인다고 해서 시선을 아예 거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스스로 아쉬워 하는 부분이라면 어떤 식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교육 제도는 수시로 바뀌고 자신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없었던 수행평가, 봉사점수, 자유학기제, 수시전형 같은 말들이 겁을 먹게 만든다. 교육 과정을 경험한 '선배'의 위치에 있음은 분명하지만 열심과 성실을 제외하면 해줄 말이 별로 없다.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기가 더욱 쉬워진다.



교육에 대한 아버지들의 감정

자녀 교육에 대해 많은 아버지들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많은 40대 아버지들의 자녀들이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 골고루 포진해 있다. 그 자녀들의 공통점은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피 터지는 투쟁의 장에 들어선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도 학원을 몇 군데 돌고 들어와 힘 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함이 앞선다. 과연 이 아이가 세상에 나가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 그 삶을 위한 경쟁에서 뒤처지지는 않을 지 걱정이 된다. 마음 같아서야 쉬게 하고 놀게 하고 싶지만, 현재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 그렇게 해서는 아이들의 경쟁력을 키울 수가 없다. 그나마 학벌이라도 갖춰야 좀 더 편히 산다는 것을 아버지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그런 세상에 몸을 던져 놓고 있기 때문에 더 잘 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의 시스템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고 100% 확신하는 사람은 잘 없다. 좋은 대학이 좋은 직업을 완벽하게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직업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고방식에는 수긍할 수 밖에 없다. 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순간 자녀의 삶은 50대 50의 도박처럼 되지 않을까 겁이 나는 것이다. 사실 좋은 직업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한 것도 아니다. 대기업에서 일하든 중소기업에서 일하든,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노동 시스템 안에서는 일정 정도 마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심할 때는 모욕감을 느끼거나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어떤 직업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잘 없다. 세상이 워낙 속물적이어서 ‘좋은 직업’을 ‘오랫동안 돈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고 정의해 버린 탓에 직업의 이면을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사회가 규정한 교육 시스템 안에서 경쟁을 거치고 나와 사회에 진출한, 그리고 사회의 속살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40대 남자들은 현재 교육 시스템에 대해 스피노자가 말하는 ‘반감’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반감’은 어떤 대상이 우연히 슬픔의 원인을 떠오르게 할 때 느끼는 슬픈 감정이다. 40대 남자들의 학창 시절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절규가 외쳐지던 때였다. 밤 10시, 11시까지 자율학습이라는 미명 아래 학교에 감금당하다시피 했고, 성적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사회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학업 성적은 철저하게 개인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유로 교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겼다. 40대 남자들의 학교는 그랬다.


시간이 흘러 학교의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는 구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교육 시스템 안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아이들은 교육을 마치고 나면 사회가 정하는 기준에 따라 줄을 서게 된다. 그리고 줄을 벗어나지 않는 한, 순서에 따라 직업을 배분 받게 될 것이다. 공정해 보이긴 하지만 결코 평등하지 않은 이 시스템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아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40대 남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에 자녀들을 대입시키게 되면 자신이 가졌던 우울함과 서글픔이 되살아나게 된다.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지금의 교육 시스템을 거부하는 '반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서 아버지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자녀의 교육에 무관심해야 한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방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버지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냐는 설문조사의 답을 보면 그런 생각이 확실히 드러난다. 거의 대부분의 설문에서 ‘친구처럼 편한 아버지’라는 답이 1위를 차지한다. 교육 시스템에 반감이 있기 때문에 그런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녀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에 시스템에 굴복을 할 수 밖에 없다. 백 번 양보해서 자녀교육에 대한 무관심은 거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비용의 지불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자녀의 교육에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들이 교육 시스템에 대해 갖는 반감은 ‘바람’의 다른 형태일지도 모른다. 무관심한 아버지가 아니라 친구 같이 편안한 아버지로 자녀 교육에 문제가 없는 세상에 아이들을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자녀 교육에 관한 아버지의 태도를 말할 때, 아버지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마치 아버지들 스스로가 방관자의 위치를 선택한 것처럼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다. 물론 아버지들의 전향적인 태도가 자녀들의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아버지들의 운신의 폭은 너무나 좁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혁명적으로 변하지 않은 이상, 아버지들이 ‘친구처럼 편한 아버지’와 ‘부모의 경제력’이라는 이중적인 태도와 감정을 갖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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