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40대 남자

불안한 그대, 열심히 일하라 - 일중독

김성열 2018. 5. 1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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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그대, 열심히 일하라 - 일중독


특정한 노동활동을 하고 그에 대한 댓가로 보수를 받는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고용 유지 여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든 남의 밑에서 일하든 처지는 비슷하다. 나의 고용 여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 혹은 시스템이나 환경의 몫이다. 예를 들어 장사나 사업이 잘 돼서 권리금 높게 받고 가게를 넘기거나 높은 값에 주식 팔고 사업체를 넘기고 그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장사나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접어야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떠밀린 거라고 봐야 한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다. 고용의 유지를 원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스스로 고용을 포기하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남는 건 고용 유지인데, 그 선택은 일하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조직의 몫, 시스템의 몫, 조직과 시스템에 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몫이다.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절을 살고 있는 40대 남자의 경우에는 고용의 유지를 원할 수 밖에 없다. 마음 속으로는 이 놈의 회사, 이놈의 장사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겠지만,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당장 일을 그만두면 생활의 유지가 어렵다. 비록 다른 연령대나 성별에 비해 40대 남자의 소득이 가장 많다고는 한다. 하지만 버는 족족 쓰기 바쁘고, 그 동안 모아둔 재산이 많다고 해도 나머지 삶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40대 남자 직장인의 경우라면 그나마 목돈이 되는 퇴직금을 털어먹는 데 몇 년 걸리지도 않는다. 울며 겨자 먹기가 되든, 월급도둑이 되던 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계속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 평범한 40대 남자들의 상황이다.


고용과 삶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이런 현실에서 ‘고용의 해지’는 삶에 균열을 낼 수 밖에 없다. 고용에 대해 불안한 감정을 갖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40대 남자들은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다시 자리를 잡기가 어렵다. 40대만 되어도 직급이나 연봉이 높은 편에 속한다. 고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최대한 비용을 아끼면서 능력 있는 사람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40대 남자들은 기존에 받던 대우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아직은 돈이 들어갈 곳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40대 남자들은 일의 노하우도 제법 있고 경험도 많고, 아직까지는 한창 일할 때가 맞긴 하다. 하지만 고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원하는 만큼 대우를 해주기에 부담이 된다. 이왕이면 비싼 40대 차장이나 부장을 쓰느니 30대 과장을 쓰는 게 더 낫다는 생각으로 기울기 쉽다. 헤드헌터들은 40대를 가장 인기 없는 연령대라고 하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40대 남자들은 열심히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일이 좋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다. 세대나 연령에 관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실제로 신입사원의 48.5%가 직생생활의 목적을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이라고 답한 설문조사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아실현과 직업의 관계는 그렇게 끈끈하지 않다. 당장 계좌에 돈 100억원이 꽂혀도 직업을 고수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아주 희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장 회사를 그만 둘 것이고 장사를 집어치울 것이 뻔하다. 대기업에 입사를 하고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자아실현과 별로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차라리 아프신 할머니의 무릎을 고쳐주기 위해 의사가 되고자 하는 어린 아이의 꿈이 자아실현과 더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으로서 하는 일은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40대 남자들이 역시 자아실현을 위해서, 좋아서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된다. 


다만, 일하는 이유와는 별개로 일을 하도록 만드는 동력(동기)은 존재한다. 돈을 많이 번다거나, 인정을 받는다거나, 성취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각자의 욕망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 동력이 된다. 이런 욕망들은 ‘고용된 상태’에서만 달성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욕망이 많이 달성될수록 ‘고용 상태를 유지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반면에 일자리를 잃으면 돈도,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도, 성취감도 일을 통해서 획득할 수가 없다. 이 구조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된다. 고용을 보장 받아 욕망을 달성할 기회를 얻고, 욕망을 달성하여 고용을 보장 받아 다시 욕망의 달성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욕망의 달성 여부에 따라 욕망을 달성할 기회를 부여 받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구조다. 이렇다 보니 그 욕망들의 밑바닥에는 고용에 대한 불안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불안은 불쾌한 감정이고, 인간은 불쾌한 감정이 생기면 그것을 없애거나 피하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열심히 일하는 행위는 고용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실적을 내면 나의 가치는 올라가고 그만큼 생존 확률은 커질 테니 말이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고용불안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방법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간혹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일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일중독/워커홀릭(Workaholic)이다.


중독이란 어떤 행동이나 물질이 쾌감을 주면 그 행동이나 물질의 섭취를 반복하고 싶은 욕구가 강화되어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중독은 쾌감(즐거움)과 연결된 개념이다. ‘일중독’이라는 개념은 그런 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쾌감을 주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간혹 순수한 성취욕 때문에 일에 중독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즐거움, 쾌감을 얻지 못한다. 일을 하면 보상이 주어지고, 그 보상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요에 의해서,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즐겁지도 않은 ‘일하기’에 중독되는 것은 뇌의 보상회로와 관련되어 있다기 보다는 강박 장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강박 장애는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불안증(불안장애)의 한 가지다. 세균에 오염될까 불안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을 씻고, 도둑이 들까봐 불안해서 자기 전에 몇 번이나 문단속을 확인 하는 것이 불안증이다. 고용불안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주 특별하거나 특출한, 유일무이한 능력과 기술을 지니지 않았다면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최선이 방법이 된다. 그 최선의 방법으로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일중독자, 워커홀릭이다.



산업노동연구원의 <일중독 측정과 실태>라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의 7%가 일중독자라고 한다. 그 중에서 40대의 일중독 비중이 8.6%으로 가장 높다. 여성과 남성의 일중독 비중이 각각 7.6%, 6.1%이니 단순 비례로만 계산해도 40대 남자의 일중독 비중은 9%가 넘는다는 얘기다. 또, 일용직이나 자영업자가 일중독자가 될 확률은 일반 상용직 보다 4.1%가 높고, 일용직의 경우 일이 없을 때는 조바심이나 불안감을 가지는 금단증상을 겪는다고 한다. 고용의 안정성과 일중독이 상관관계에 있고, 일을 하지 않을 경우 금단증상까지 일으키는 지경까지 이른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이 더 커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일중독자는 안정적이지 않은 고용 상태로부터 오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일에 매몰된 상태인 것이다.


다행히도 모든 40대 남자들이 일중독자는 아니다. 하지만 일중독자가 아니라고 해도 마음 한켠에는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다. 당연히 고용의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불안도 그만큼 더 커진다. 슬슬 퇴직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40대 남자들의 고용에 대한 불안은 20대, 30대의 그것과는 다르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더 많은데다가 한번 자리를 뜨면 원래 있던 수준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의 일자리는 더욱 절실하고 소중하다. 앞서 말했듯이 40대가 다른 연령대보다 고용불안을 더 많이 느낀다. 이 말은 곧 40대 남자들은 일중독자가 될 확률도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서글프지만 40대 남자들이 처해있는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40대 남자가 가진 일의 족쇄를 풀어낼 뾰족한 방법은 없다. 지금처럼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선택할 자유가 희박한 상황에서는 40대 남자의 고용불안은 고용이 해지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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