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40대 남자

40대 남자의 슬픔 - 수저의 대물림 II

김성열 2018. 6. 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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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자의 슬픔 - 수저의 대물림


II. 개천에는 용이 없다.

옛날처럼 개천에서 용이 나는 자수성가 스토리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깨끗하고 쾌적한 대형 수족관에서 용이 양식되는 세상이다. 실제 통계를 봐도 그렇다. 신한은행이 발표한 <2018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에 따르면 월평균 소득이 1천만원 이상인 가구의 자녀 1인당 총 교육비는 1억 4천 484만원이다. 이는 월평균 소득이 300만원 미만인 가구의 4천 766만원의 3배에 이른다. 또, 월소득 1천만원 이상인 가구의 자녀가 해외 유학을 하는 경우는 41.7%인 반면 월소득 300만원 미만인 가구가 자녀를 해외에 보내 교육을 시키는 것은 14.4%에 불과하다고 한다.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통설을 감안하면 계층 사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교육이 소득 계층의 대물림 수단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경제자본의 크기가 작은 흙수저 아버지의 마음은 갑갑하기 그지 없다. 경제자본의 영향을 받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면 어떻게라도 수긍하고, 인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 때 느끼는 감정들은 혼자서 감수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 없음으로 인해 자녀도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결국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자녀를 고생시킨다는 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아버지들의 감정은 불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루함, 부끄러움(자괴감), 반감, 적의, 절망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비루함은 자신을 하잘것없는 존재로 인식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자식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해줘서 자녀에게 낮은 수준의 학력자본을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가벼워 보이겠는가? 비단 일반적인 학업을 통해 얻는 학력자본에 대한 얘기만이 아니다. 자녀가 특정한 분야에 소질을 보이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부모의 능력이 모자라면 밀어주기가 힘이 든다. 어릴 적부터 소양을 갈고 닦아서 전공으로 나아가야 하는 예술이나 체육 분야가 특히 그렇다. 이 분야도 경쟁 시스템인 것은 동일하기 때문에 잘하고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이 쉽지 않다. 더구나 공교육에서는 이런 분야를 공부하려는 아이들에게 별도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 하지도 않는다. 결국 사교육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사교육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서 돌아간다. 학원, 교수 레슨, 추천서 같은 것들에는 다 비용이 들어간다. 몸으로 하는 체육 분야만 해도 장비를 마련한다, 전지 훈련을 간다 하면서 돈이 들어간다. 돈 없이는 자녀의 소질조차 키워줄 수 없는 것이다. 



중학교를 다니는 나의 딸아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정통 미술이라기 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삽화에 가깝지만 나름대로 그림 그리기에 즐거움을 느끼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뿌듯해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아내가 아이와 나눈 대화를 전했다. 아이가 그림 그리기가 좋아서 미술 계열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리저리 알아보니 미술 쪽으로 전공을 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은데다가, 비용도 만만찮은 걸 알게 돼서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아내는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며 대화를 마쳤다고 했다. 아버지인 내 입장에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줄 알긴 했지만 그 정도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미술을 전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얼마나 돈이 들어가는지 혼자서 찾아봤다. 그 결과 현실적인 부담감이 앞섰다. 미안해서 차마 딸아이에게는 말을 꺼내지 못했고 그런 채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아버지구나, 나는 무능력한 아버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들은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비루함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더불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는 부끄러움(자괴감)도 갖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은 한다. 하지만 손해 아닌 손해를 보는 사람이 내 자식이기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생긴 비루함이나 부끄러움은 그 감정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반감과 적의 같은 감정을 만들어낸다. 소득 계층을 대물림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비용의 크기에 따라 수준이 결정되는 교육 시스템과, 그 교육 시스템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반감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을 대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시스템에 자신이 동일시 여기는 자녀를 대입하게 되면 우울과 슬픔의 감정이 들게 된다. 


사람은 슬픈 감정(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면 그 감정을 갖게 한 원인을 미워하고, 제거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나오는 감정이 적의(敵意 anger)다.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적의란 내가 미워하는 대상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이 나에게, 나의 자녀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고 해악을 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진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지금의 사회 시스템에 해코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의의 대상이 되는 현재의 시스템은 너무 견고하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은 다수의 의견을 모아 법률에 입각해서 구성하고 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힘만으로 지금의 시스템을 무력하게 하거나 해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적의를 가진 다수가 모여서 의견을 개진하고 압력을 가하면 어느 정도 변화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속도가 느리고 온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단번에 적의를 해소할 만큼의 강력한 자극을 가하는 것은 어렵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무력감과 절망감이다. 시스템을 바꿀 힘도, 밖으로 달아날 힘도 없다면 시스템에 편입되어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사교육 경쟁에 뛰어들어 자녀의 학벌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흙수저 아버지들은 이러한 사교육 경쟁에 충분히 쓸만한 경제자본을 갖고 있지 않다. 경제자본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자녀 교육에 거는 ‘희망의 크기’가 달라진다. 경제자본 규모가 작은 아버지들은 그만큼 작은 희망을 가져야 하고, 때로는 희망을 아예 버려야 할 수도 있다. 시스템의 변화에 대한 의심(희망), 자신의 역량에 대한 의심(희망)이 사라졌을 때, 무력한 흙수저 아버지에게 현실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확실한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공포는 절망감을 만들어낸다.


스피노자는 절망감이란 의심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픈 감정이고, 공포에서 나온다고 했다. 즉 절망감은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느낌, 두렵지만 손 쓸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오며 스피노자는 그것을 ‘공포’라고 표현한 것이다. 많은 아버지들이 자녀 교육을 바라보면 절망감을 느끼는 것도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데서 나온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수 많은 흙수저 아버지들에게 갑자기 경제자본이 늘어날 일은 거의 없다. 늘어날 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기회 조차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회사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단번에 연봉이 뛰거나 대리에서 상무, 이사 자리로 단번에 뛰어오르지 못한다. 밤새 불 켜두고 장사를 한다고 해서 손님이 갑자기 늘지는 않는다. ‘열심히’라는, ‘목숨 걸고’라는 성공한 사람들의 그럴싸한 포장을 진리라고 여기며 투잡을 뛰고 주식 투자를 한다고 해서 인생이 극적으로 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게 힘을 쏟아 붓는 것도 잘해야 본전이지 잘못하면 건강 잃고 돈도 잃기 마련이다. 지금 한자리 지키는 것만해도 쉽지 않은 판국에 권세와 부를 한 순간에 거머쥐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리고 40대쯤 되면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주인공인지, 조연인지, 단역인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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