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가치

여행만큼 팍팍한 삶에 활력을 주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일상이 무료하다 여겨질 때 여행을 계획한다. 평소에 가고 싶던 곳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가보지 못했던 낯선 곳을 찾는다. 가깝게는 집 근처, 멀게는 물 건너 해외까지 그 영역은 한계가 없다. 한계라면 금전이나 시간의 한계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익숙하던 것들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곳에 나를 던져놓는 것은 참 신선한 일이다. 일상에서는 겪지 못한 경험이 주는 이질감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데 충분하하다. 아쉽게도 그런 기쁨이나 즐거움은 순간이다. 그래도 그 산뜻했던 기분은 좋은 기운으로 남는다. 다음 여행을 위해서라도 다시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서적인 혜택 말고도 여행이 주는 좋은 점은 또 있다. 견문이 넓어진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게 되면 그 만큼 세계관도 넓어진다. 실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더 넓어진 세계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철학적인 교훈도 여행에서 얻을 수 있다. 근대 유럽의 귀족들이 자제들을 몇 년 동안 여행을 시킨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그래서 배를 탔지 않았던가. 물론 그에게 외유를 강요한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진화론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왜곡된 여행풍속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여행을 보고 있노라면 딱히 여행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고민은 적은 것 같다. 그저 어디 어디를 여행했다는 사실을 마치 삶 속에서 건진 전리품처럼 과시하기에 바쁘다. 매체에 어떤 장소가 언급되면 여행자들이 개미처럼 들끓고, 특정한 형식의 여행(예를 들면 유럽 배낭여행이나 나홀로 해외여행 같은)이 유행처럼 번진다. 유행의 속성은 '남들처럼(만큼) 살고 있음'이다. 결국 유행을 따르는 여행은 무리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자격 획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을 굳이 SNS에 올려가며 자랑할 이유도 없을 것 아닌가.


그런가 하면 현실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행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도망하기 위해 여행을 택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영원히 도망갈 수는 없다. 배낭 하나에 몸을 맡기고 유럽을 횡단한다고 해도, 나홀로 동남아시아 지역을 샅샅히 훑는다고 해도 현실이라는 시궁창에서 완전히 발을 뺄 수 없다. 낯선 경험에서 오는 두근거림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여행은 끝은 돌아옴이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현실에서 달아나기 위해 여행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여행에 필요한 용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했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추지 않은 여행은 잠시의 도피, 삶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반대로, 새로움과 낯섦을 기꺼이 맞이할 용기와 맑은 눈을 준비한 사람이라면 뒷산을 한바퀴 돌더라도 의미있는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모처럼 휴가인데 해외 한번 가야지", "너 거기 아직도 안가봤어?", "TV 보니까 거기 사람 정말 많이 가던데, 우리도 거기 한번 가자.", "직장생활 지겨워 죽겠다. 멀리 여행이나 한번 갔다 와야겠다." 이런 말들로 여행을 꾸리는 것은 여행이 주는 큰 의미를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 먼 곳으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주진 않는다. 그건 미신이고 환상이다. 편견과 굳은 생각에서 벗어날 각오로 맞이하는 여행이 나를 바꾼다. 내가 바뀌면 나의 삶의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여행자와 방랑자

여행을 통해 의식과 관념, 생각과 시각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상으로 점철된 삶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낯설고 새로운 것들로 인한 변화마저 받아들일 마음이 충분한 사람이, 단지 익숙하고 무료하다는 이유로 일상의 변화를 외면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핵심이 아니다. 어떤 생각과 시각, 마음가짐으로 돌아올 지가 여행의 핵심이다. 그런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살갗에 닿은 것만이, 뷰파인더에 가둔 잡다한 풍경만이 여행의 전부라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다. 여행자는 돌아오는 길을 알지만 방랑자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여행은 길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은 베푼다. 비싼 돈과 귀한 시간을 들여서 방랑을 할 바에야 차라리 방콕을 하는 편이 나을 지 모른다. 

(진각 sungyoul.kim73@gmail.com)


Posted by 김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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