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직장생활

직장에서의 왕따,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김성열 2014. 9. 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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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직장인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새로 들어간 회사에 직원들 일부가 자신을 따돌려서 힘들다는 얘기였다. 어느정도냐 하면 지하철을 함께 탔다가도 자기만 빼놓고 다른 칸으로 무리지어 옮겨간단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짓거리지만 당사자는 무척이나 속상한 얘기다.


집단 따돌림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따돌림을 피하기 위한 행동 양식들을 얘기한다. '자신감을 가져라', '당당하게 행동하라', '기죽지 마라', 심지어는 '따돌림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나의 행동을 고쳐라' 같은 말을 한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에게서 해결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다.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집단 따돌림은 개인에 대한 집단의 폭력이다. 피해자에게서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가해자의 당위성을 찾아주자는 얘기 밖에 안된다.


약자는 무리를 짓는다

범위를 직장(회사)로 단정해서 생각하자. 집단 따돌림의 행위자는 집단이다. 하지만 그 집단은 공식적 집단이 아니다. 회사라는 집단 안에 왜 또다른 비공식 집단이 만들어지는가. 그걸 알아야 그 집단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대응책을 고민할 수 있다. 특정한 목적을 갖는 사회적 집단을 제외하고 인간이 관계 중심의 집단을 만드는 이유는 두려움이다. 두려운 이유는 자신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는 혼자서는 살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무리를 짓는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같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회사의 위계질서 아래에서 약자다. 어떤 시스템에서든 약자는 두렵고 무서울 수 밖에 없다. 이런 약자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에 약자는 무리를 만들게 된다.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기해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내 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위험할지 안전할 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무리의 안정감을 깰 수 있다는 두려움과 그 안정감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배타성이 집단 따돌림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회사에서 강자가 약자에 대해서 집단 따돌림을 주도하는 일은 잘 없다. 사장, 상무, 이사, 부장 등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따돌리는 경우는 잘 없다는 얘기다. 그들에게 부하 직원은 그들의 성과를 달성하고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잔소리를 하든, 칭찬을 하든, 다독이든 간에 어떻게든 자신의 영역 안에 두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를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기대한 바에 턱 없이 못미칠 때다. 그것도 따돌림이라는 방법이 아니라 인사고과 따위의 시스템에 의존해서 영역 밖으로 내보낸다. 약자의 영역 관리와는 그 궤가 다르다.


스트레스와 열등감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편, 잘난 사람에 대한 열등감을 집단 따돌림의 원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딱히 공감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인 사회적 소양을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집단 따돌림이 옳지 않은,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남의 고통(외로움, 소외감)을 보면 자연스럽게 공감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고통을 스스로 주도하면서 공감을 거부하고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 합리성을 부여하는 행위는 (인지부조화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 과정에서 남의 고통을 전혀 인지 하지 못한다면, 즐거움을 느끼고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그건 지독한 사이코패스다. 집단 따돌림을 한다고 해서 사이코패스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잘난 사람에 대한 열등감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다.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을 보면 공부 잘하는 우등생은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잘 없다. 왜냐하면 집단 따돌림은 대상은 강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능력이 우선하는 곳이기 때문에 능력이 충출한 사람은 강자의 서열로 인식된다. 약자의 집단으로서는 스스로를 왕따 시키면 시켰지 강자를 따돌리지는 못한다. 집단 따돌림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동물의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 따돌림을 하는 경우에 대상자가 '잘난 척 해서'라고 이유를 붙이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따돌림이라는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진짜 잘난 사람이라면 따돌림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또 '잘난 척' 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배척의 기준이 될 만한 것도 아니다. 좋게 보아야 '텃세' 수준인 행동에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다는 것부터 말이 안된다.


직장 내 왕따의 이유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이 생기는 이유 하나는 시스템이 직원들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안정감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느끼는 안정감이다. 성과에만 집중해 직원을 도구처럼 취급하는 회사에서는 패거리 문화가 싹튼다. 그 패거리 안에 있어야 약한 내가 힘을 가질 수 있고 회사가 주지 못하는 안정감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패거리(무리)는 안정감을 얻으려는 본능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배타성 역시 동물적이다. 그 배타성이 극대화되면 능동적인 집단 따돌림이 생긴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명령과 복종보다 타협과 배려를 일상화한 회사는 직원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회사가 내 편이면 굳이 그 안에서 내 편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패거리를 만들거나 무리를 짓지 않는다. 직원들이 느끼는 안정감은 '우리는 하나', '가족같은 회사' 따위의 그럴싸한 구호로만 완성될 수 없다. 회사가 관심을 쏟고 리더가 직원들 사이로 들어가 모두를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집단 따돌림은 발생한 다음에는 방법이 없다. 발생을 사전에 막는 것이 최선이다.



왕따에 대처하는 자세

이미 발생한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의 문제는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집단 따돌림을 행하는 사람들과 당하는 사람의 관계 설정은 절망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집단 따돌림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생각을 바꾸는 일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교육도 충분히 받았고 사회 경험도 있고 머리도 굵을대로 굵은 사람들의 인성이나 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별다른 계기가 없는 한 그들은 평생 그렇게 살 것이다. 이미 일이 터진 마당에는 회사가 나서더라도 단기간에 문제를 바로잡기도 힘들다.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무리에 들어가면 따돌림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시원한 문제 해결 같다. 하지만 그 방법은 나 대신 또다른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드는 비겁하고 저열한 방법이다. 평소 같으면 그런 사람들과 한 집단을 이루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는 극악한 상황에 처하니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가해자는 그것을 빌미로 권위를 쌓는다. 이 매커니즘에 빠지면 안정감은 찾을 수 있겠지만 남을 괴롭히는 가해가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따돌림 당하는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헛소리는 가볍게 씹어주자. 피해자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 집단 따돌림은 오직 그들이 못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하찮은 집단의 권위에 도취해서 자신들의 행동을 바로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따돌려 준다면, 그들의 인성과 바탕을 충분히 드러낸 준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이 낫다. 별 것 아닌 약자들의 틈에서 질 낮은 안정감을 선택할 바에야 과감하게 외로움과 소외감을 선택하는게 낫다.


어차피 그 직장에서 뼈를 묻을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과 관포지교의 우정을 맺을 것도 아니라면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을 택하라.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능력을 키우고 업적을 이루어서 강자가 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벌어지는 그들의 핍박과 무시, 음해는 견뎌내는 수 밖에 없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그들의 매커니즘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 집단 따돌림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다. 하이에나는 몰려 다니지만 호랑이는 혼자 다닌다. 강자는 무리는 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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