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하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세 개 있다. 4대보험, 근로소득세, 그리고 회식이다. 팀 회식, 부서 회식, 전체 회식, 간부 회식, 임원 회식, 번개 회식, 생일 축하 회식, 송년 회식, 신년 회식 등등등. 그럴싸한 건수만 있으면 회식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성립 가능하다. 기업의 인원 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게는 테이블 몇 개, 크게는 식당이나 주점 하나를 통째로 빌리거나 그것도 모자라면 넓디 넓은 야외에 밥상과 술상을 차린다. 임원이나 간부급 인사의 건배사와 함께 고기를 굽고 술을 따르고 잔이 돈다. 겉에서 보면 아름답고 훈훈한 풍경이지만, 몇몇 직원들의 핸드폰 카메라에도 그런 장면들이 남지만, 모두에게 아름답고 훈훈하지는 않은게 사실이고 현실이다.
실제로 회식 같은 것 안했으면 좋겠다는 직장인들의 목소리가 ('있다' 정도가 아니라) 많다. 당사자가 원해서 참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원해서 가야만 하는 자리이고 직장의 수직적 계급 구조가 컴퓨터 책상에서 밥상, 술상으로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입도 깔깔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잔을 뒤집어 놓기가 눈치 보이고 때에 따라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2차, 3차까지 달리는 것도 곤욕이다. 게다가 회식이라는 것은 업무 이외의 시간을 할애하기 마련이다. 하루에서 얼만 안되는 개인의 시간을 원치않게 빼앗기는 것을 반길 사람은 잘 없다.
회식의 이유
그래서 회식을 싫어하는 직장인들이 제법 많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회식을 하잖다. 이유가 없지 않다. 회사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니 서로의 관계가 곧 능률과 직결되므로 연대감을 고취하고, 회사 분위기를 업(up) 시키고, 평소의 진지함 대신 진솔함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정을 쌓고, 나아가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의도는 좋다. 하지만 그 형태는 다소 전체주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회식을 하면 연대감이 높아질까? 아마 연대감이 심하게 낮아진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연대감이 하늘을 찌를 듯 하지는 않는다. 하루 저녁 밥 같이 먹고 술 같이 마신 것으로 연대감이 높아지고 끈끈한 정이 쌓인다면 회식은 매일 해도 아깝지 않으리라. 결국 그 좋았던 회식 자리에서의 분위기는 일시적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연대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라고 쇼를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직장인에게 있어서 회사는 생활에 필요한 수단인 돈을 벌러 나오는 곳이다. 원천적인 '출근의 동기'를 놓고 보면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 연대감이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그 자체를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실제 평소 생활에서도 연대감과 소속감을 고취하기 위해 그렇게 악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회식 얘기만 나오면 연대감이 중요해지고 끈끈한 정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는 곧 회식의 목적이 어쩌면 연대감 고취에 있지 않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계급의 확인
그렇다면 이런 회식을 굳이 하려드는 윗분들(회식의 결정은 보통 윗분들의 재량이다)의 속셈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계급과 권위의 확인이다. 업무를 하는 것은 공적인 행위이다. 공적인 행위에서 계급과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공적인 상황을 벗어났을 때 계급과 권위는 인정받지 못한다. 직장에서의 계급과 그에 따른 권위의 한계는 출퇴근 시간에 의해 정해진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밥을 같이 먹고 술잔을 마주 기울이는 것은 사적인 행위에 가깝다. 회식을 하면 이 사적인 행위에서마저 계급과 권위를 확인할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을 만끽할 수도 있다. 윗분의 명에 따라 사발주가 왔다 갔다하고, 윗분의 술잔을 거절하기 힘들며, 윗분의 소싯적 이야기에 귀를 세워야하고, "이 대리, 잠깐 이리와" 같은 말에 술잔을 들고 테이블 서너 개를 건너가야 한다. 윗사람의 입장에서 사적인 영역에서마저 계급과 권위를 서로가 확인하는 수단으로 회식만한 것이 없다.
방식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회식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니 몇 해 전부터 그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술상과 밥상을 뒤로 물리고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거나 영화를 단체 관람하거나 한다. 고궁을 걸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거나 등산이나 트래킹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개성과 기호가 다른 지라 그것마저도 시원치 않다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돈다.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분위기가 바뀌진 않았다는 얘기다.
뮤지컬을 보든 삼겹살을 굽든 그 모임의 기본 바탕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맨정신에 하는 문화의 향유가 술상을 앞에 둔 회식보다 못할 수도 있다. 적어도 술을 어느정도 먹다보면 나를 옥죄던 그 무엇인가로부터는 조금 유연해질 수 있다. 같이 술을 들이키는 다른 이들도 그렇기 때문에 술상 앞에서는 평소보다 좀 더 느슨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그런데 맨정신으로 윗사람과 같이, 평소에 인간적인 유대감이 크지 않은 동료와 영화를 관람하고 뮤지컬을 보고 산을 같이 오른다면 긴장감과 불편함은 어느정도 지속될 수 밖에 없다.
파티는 끝났다
딱히 방법이 없다. 개인마다 식성과 기호도 다르고 연대감과 유대감의 필요성, 바라는 인간관계,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 사적 영역에 대한 중요함의 정도도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한 가족', '우리는 하나'라는 정서를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가능을 알면서도 (그 시도의 의의는 높이 살 수 있겠지만) 연대감이 높고 소속감이 충만하다는 일시적인 느낌을 얻기 위해 쇼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회식의 내면이다.
그나마 한가지 정도는 커버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 회식을 오후 2시쯤부터 해서 6시 전에 끝내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업무 외 시간을 방해받는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인 정서는 예전과 다른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회식이라는 것이 직원들에게 특정한 마음가짐을 강요하진 않는지, 계급과 서열, 권위를 재확인하는 수단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일반 직장인들에게는 친한 동료들끼리의 소맥 한잔, 소규모 팀 단위 정도의 가벼운 모임, 더운 여름날 퇴근 후 부서장이 사주는 시원한 맥주와 치킨 정도면 충분할 지도 모른다. 회사에 대한 애정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총합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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