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40대 남자

중년 남자의 눈물 (1) - 그들에게 눈물이란

김성열 2019. 2. 1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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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레오나르도 다 빈치“눈물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고 했다. 의학이나 생리학을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엄연히 틀린 말이다. 눈물은 머리도 아니고 가슴도 아닌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체액이다. 눈물은 이물질이나 감염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눈을 적시고 있다. 때로는 눈에 무엇이 들어가거나 자극이 있을 때도 눈물이 나온다. 이런 과학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기쁨,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의 부산물이자 그 감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눈을 촉촉하게 적시기 위해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눈물이 하루 1그램 정도지만 감정이 북받쳐서 흘리는 눈물은 그 수 십 배 이상은 되고도 남으니 눈물을 감정과 연계시키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과학자들도 눈물과 감정의 연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료생명공학을 연구하는 크리스토퍼 로(Christopher R Lowe) 교수는 눈물을 기저 눈물(basal tears), 반사 눈물(reflex tears), 정서 눈물(psychic tears)로 구분한다. 


기저 눈물은 각막을 항상 촉촉하게 유지하고 먼지 같은 이물질로부터 눈을 보호하고 영양소를 공급하며 감염을 막는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포유류 동물의 눈은 눈물에 의해 항상 젖어 있다는 점에서 기저 눈물은 전형적인 체액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사 눈물은 눈이 자극을 직접 받았을 때 흐르는 눈물이다. 이물질이 눈에 들어가거나 양파처럼 맵거나 연기처럼 자극적인 물질이 눈에 닿았을 때 자극을 줄이기 위해 흐르는 눈물이 바로 반사 눈물이다. 반사 눈물은 밝은 빛을 보거나 혀와 입에 강한 자극이 있을 때도 나오며, 구토를 하거나 하품을 할 때 나오는 눈물도 여기에 속한다. 


정서 눈물은 감정이나 정신상태에서 유발되는 눈물이다. 정서 눈물은 기저 눈물이나 반사 눈물 같은 기능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성분에도 차이가 있다. 정서 눈물의 경우 기저 눈물이나 반사 눈물과는 달리 부신피질 자극 호르몬, 프로락틴, 엔케팔린 같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기저 눈물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산다. 반사 눈물은 눈이 자극을 받았을 때 당연히 나오는 신체 반응이라고 여긴다. 반면에 정서 눈물은 신체를 위해 특정한 기능을 하는 눈물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가 났을 때 흘리는 눈물을 신체 작용을 넘어서는 정신 활동이나 정서적 표현에 포함시킨다. 나도 모르게 각막을 적시고 있는 눈물이나 양파를 썰다가 나오는 눈물과는 양과 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그 눈물의 경험은 기능적인 눈물보다 깊고 오래 간다. 같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지만 정서 눈물을 ‘진짜 눈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눈물의 의미

눈물은 다양한 정서와 연결된다. 그 중에서 눈물과 가장 가까운 정서는 슬픔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슬픔의 감정이 커졌을 때 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눈물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눈물이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다. 남성도 분명히 운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눈물이 많다는 말 역시 어느정도 맞다. 눈물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생화학자 윌리엄 프레이(William H. Frey)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앞서 정서 눈물에 포함되어 있다고 언급된 프로락틴이 눈물샘을 자극한다고 한다. 프로락틴은 모유 생성을 촉진하는 호르몬으로 사춘기가 지나면서 여성의 프로락틴 수치는 남성보다 60% 이상 증가한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호르몬이 많은 만큼 여자가 남자보다 상대적으로 눈물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눈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에 관한 실제 연구도 있다. 30개 국가의 2,323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남성은 한 달 평균 1.0회를 울고 여자는 2.7회를 운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수치가 우리의 일상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한 시사주간지에서 직장인 남성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울고 싶을 때 참는다고 대답한 비율이 80%였다. 또, 응답자의 64%가 1년 이내에 운 적이 없다고 답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답한 비율이 38.5%, “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답한 비율이 31.8%였다. 이는 눈물이 단지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성으로 남성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잘 드러낸다. 



중년 남자의 눈물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중 화장실의 남자 소변 칸을 보면 이런 말이 마치 유행인 듯 붙어 있곤 했다.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표현이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의 눈물이 갖는 의미를 이만큼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청결한 일처리를 요구하는 위트 넘치는 경고로 받아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한 성별에 맞는 행동 양식이나 태도를 규정하고 요구하는 일은 이제 전통이라는 말로 포장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요즘 청소년이나 젊은 층에게 이런 얘기를 스스럼 없이 하는 사람은 드물다. 남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여자는 시부모 공경하고 남편 잘 뒷바라지 하고 아이 잘 키워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 성차별 요소가 가득한 생각은 그 근거에 무엇에 있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본의 아니게 받아들이며 인격을 형성해온 중년 남자에게는 관념의 변화를 요구하는 세상의 진화가 낯설다.


중년 남자에게 눈물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다. 될 수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참아야 하는 감정 표현의 부산물이다. 특히 슬픔과 고통의 눈물은 금기시 되는 면이 강했다. 모든 요즘 남자 아이들은 다르게 배우겠지만, 중년에 든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눈물을 참아야만 했고 감춰야만 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눈물을 금지 당하고 감정의 절제를 요구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와 같은 말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행동 지침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행동 지침을 따르지 않는 남성은 나약하고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지금의 중년 남자들에게 눈물을 참는 일이 일종의 아비투스(Habitus)로 자리 잡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비투스(Habitus) :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행동 체계나 성향.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처음 사용하였다.


남자의 눈물은 나약함과 남자답지 못함의 표시였다. 요즘은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예전에는 ‘울면 지는 것’이었다. 주먹다짐 끝에 흘린 코피 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눈물이었다. 맹렬히 투쟁하고 피투성이로 쓰러질지언정 울보가 되어서는 곤란했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며 눈물을 참는 남자다운 모습에 스스로 우쭐하기도 했다. 쓴웃음으로 ‘안녕’을 말한 뒤 돌아서서 굵디굵은 눈물을 흘리는, 혹은 눈물을 삼키는 모습은 남자만이 연출할 수 있는 클리셰 중 하나였다.


이런 ‘남자다움’은 남자라는 이름의 허세와 치기에 훨씬 가깝다. 남성 본인들도 나이가 들면서 코피가 날 정도로 맞으면 눈물이 자동으로 흐른다는 사실, 일생 세 번만 우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 돌아서서 흘린 눈물이나 마주보며 흘린 눈물이나 이별하는 판국에는 별로 소용이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고야 만다. 하지만 이러한 앎과는 별개로 남자는 나약하지 않아야 하며 그렇기에 눈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은 40대 이상의 중년 남자들의 마음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주변의 공감을 충분히 끌어내기도 어려운 오래된 관념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비록 남자다움의 속박을 벗어난다고 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염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더라도 남들 모르게 참으면 굳건하고 남자다운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 잃는 게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눈물을 보일 경우 나약하고 소심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눈물을 보여서 남자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공자는 나이 40을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불혹(不惑)이라고 했지만 조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세간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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