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가 눈물이 많아지는 이유
중년 남성들은 눈물의 현실성과 남자다움이라는 관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남자다움 쪽으로 타협을 본다. 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별개로 눈물은 많아진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책을 보다가, 예전 같으면 별 것 아닌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진다. 어떤 때는 넋 놓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전보다 눈물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아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는 눈물에 대한 금기 의식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어쩌다가 눈물을 들켜서 “당신, 지금 우는 거야?”, “엄마, 아빠 울어!” 같은 얘기를 듣게 되면 얼른 눈물을 훔쳐내고 너스레를 떨며 무안해 한다. 자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지만 자기 감정의 흔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중년 남자들에게 눈물이 많아지는 이유는 호르몬 때문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남성의 경우 중년에 접어들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들고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런 호르몬의 비율 조정 덕분에 공격성은 낮아지고 공감하는 능력은 커진다. 그 결과 그 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눈물이 많아지고 무뚝뚝하고 과묵한 사람이 아줌마처럼 수다스러워진다. 다시 말해 중년 남자들은 호르몬 분비량 때문에 슬픔이나 감동 같은 ‘마음을 흔드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전보다 더 민감해진다는 뜻이다.
적어도 생리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중년 남성의 많아진 눈물은 호르몬 분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남자는 나약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래서 눈물 따위는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프레임 안에서 살아온 중년 남자의 입장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전에 없던 눈물은 어색하고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갑자기 많아진 눈물이 낯설고 어색한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관념 체계에서 보자면 잦은 눈물은 전보다 약한 남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 중년의 남성에게 “나이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라는 말은 육체적인 약함과 정신적인 약함을 모두 아우르는 서글픈 얘기다.
다행히도 전보다 조금 많아진 눈물은 그저 수성 성분, 지질 성분, 점액 성분으로 구성된 체액에 지나지 않는다. 신체의 노화는 차면 기울고, 피고 나면 시드는 자연의 섭리를 따른 ‘변화’에 불과하다. 눈물이 좀 많아졌다고 해서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나약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눈물의 양으로 강함과 약함을 구분한다면 테스토스테론을 많이 분비하는 남자가 가장 강한 남자, 남자 중의 남자가 된다. 이렇게 단편적이고 분류 방식을 지지할 사람은 없다. 이렇게 보면 중년 남성의 눈물은 당사자나 주변 모두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중년 남자는 언제 눈물을 흘릴까?
호르몬의 분비 문제와 함께 중년 남자의 공감 능력을 일깨우는 요소가 그들의 마음 속에, 기억 속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공감은 다른 이의 감정에 동조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이의 감정에 동조하는 일은 마음만으로 쉽게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처지나 상황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갖는 지 이해해야 한다. 이런 과정은 연민이나 동정처럼 감정적 끌림만으로는 할 수 없다. 공감에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의 처지와 상황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그 환경에서 감정을 집어내려 할 때, 비슷한 감정의 경험만큼 요긴한 것도 없다. 영화 속 아이를 잃은 부모의 절규에, 다큐멘터리 속 폐지 줍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속절없이 눈물샘이 터져버리는 이유가 있다. 100% 같진 않더라도 맥락이 닿는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년 남성은 눈물을 참고 있을 뿐이지 이미 마음 속에는 눈물샘을 터뜨릴 만한 감정을 잔뜩 지니고 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자녀에 대한 미안함, 아내에 대한 고마움 같은 감정들은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여 있다. 여기에 더해서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생기는 숱한 일들로 인해 생긴 슬픈 감정들이 내려놓을 겨를도 없이 쌓여간다. 이렇게 쌓인 감정의 기억과 경험들이 공감 능력을 배가하는 것이다.
중년 남성들을 보면 그런대로 세상을 잘 헤쳐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싶은 세상의 눈과 그렇게 보이고 싶은 남자들의 겉치레가 만들어낸 사회적인 착각일 지도 모른다. 남성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한국 남성의 전화’의 경우 상담자의 절반이 40대라고 한다. 상담 내용을 보면 아내의 이혼 요구, 아내의 외도, 본인의 외도, 처가와의 갈등, 자녀와의 갈등, 알코올이나 도박 중독, 성 문제, 직장 스트레스 같은 일상에서 얼마든지 생기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 곳을 찾는 남자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얼마 전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국밥집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저녁이 되면 혼자서 국밥 한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어두운 얼굴로 ‘혼술’을 하는 중년 남성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잦지는 않지만 눈물을 흘리는 손님을 본 적도 있다고 한다. 같은 중년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중년 남자들은 이미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눈물의 역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생리 반응이면서 동시에 감정 활동에 포함되는 반응이다. 슬픔이나 분노, 기쁨 등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 나오는 눈물을 참는 것은 결국 감정을 통제하려는 행위가 된다. 상황에 따라서 감정이 통제되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상황의 맥락을 무시한 채 남자라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눈물을 참아야 한다는 관념은 인간의 정서 활동에 반하는 일이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 자극을 받으면 그것에 반응한다. 정신도 다르지 않다. 정신이 자극을 받으면 감정이 생긴다. 감정 반응의 일부분인 눈물을 통제하라는 말은 바늘로 손끝을 찌르면서 피를 흘리지 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으려면 엄청나게 힘이 든다. 울컥 솟아나는 분노를 참으면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슬픔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못하는 것 역시 고통이다.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면 몸과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든 것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장마철에 갑자기 불어난 물은 제방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감정도 비슷해서 적당히 흘려 보내지 않으면 마음이라는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 감정의 표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더 늘리지 않는 방법이다.
눈물을 참는 것은 몸에도 좋지 않다. 윌리엄 프레이(William H. Frey)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눈물은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슬플 때 흘리는 눈물에는 카테콜라민이라는 호르몬이 함유되어 있다. 이 카테콜라민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분비되며 일명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카테콜라민은 대장균이나 세균의 질병을 일으키는 능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많이 쌓이면 건강에 좋지 않다. 윌리엄 프레이 박사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 카타콜라민을 배출하여 스트레스나 질병을 피하기 위한 신체의 자기 방어라고 말한다. 윌리엄 프레이 박사 입장에서 눈물을 참는 일은 몸의 스트레스를 배가하고 질병을 일으킬 확률을 높이는 건강하지 못한 행위인 것이다.
실제 심리 치료에도 눈물이 효과를 발휘한다. 1970년대에 등장한 ‘프라이멀 요법(Primal Therapy)’ 은 울음을 통해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는 심리치료법이다. 세계적인 팝 밴드인 비틀즈의 존 레논이 비틀즈의 해체 이후에 생긴 마음의 고통을 이 방법으로 치료했다고 한다. 또, ‘미스틱로즈’라는 명상법에서는 웃음과 눈물과 침묵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런가 하면 1997년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망 이후 영국의 우울증 환자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죽음을 눈물로 애도했는데,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눈물을 흘린 덕분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나도 몇 해 전부터 나름대로 눈물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할 때면 혼자 방에 들어가서 슬픈 영화 한편 보면서 원없이 눈물 흘린다. 영화를 보는 목적 자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굳이 가족들과 함께 하지는 않는다. 눈치 볼 일을 최소화 시킨 환경에서 가끔은 약간의 울음을 동반하기도 한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한숨 푹 자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을 느낀다.
'남자다움' 보다 '사람다움'을
이처럼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덜어낸다는 점에서 눈물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런 기능적인 면보다 더 중요한 눈물의 의미는 ‘인간적’인 데에 있다. 눈물이 나올만한 일 앞에서 억지로 참는 것은 남자다움 이전에 인간적이지 못한 일이다. 아무리 마초 성향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남자다움과 인간적인 것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하지 않겠는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못해도 30년을 참아왔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당연히 어색하고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 앞세우다가는 평생 센 척 하면서 살아야 한다. 감정에 마음이 흔들려 눈물을 흘리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몇 번 하다 보면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익숙해진다.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라 어렸을 때부터 눈물을 꽤나 잘 글썽였다. 하지만 나 또한 남자다움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지라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40대에 들어서서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영화의 슬픈 장면을 앞에 두고 괜스럽게 헛기침을 하고 화면에서 눈을 돌리는 내가 부자연스럽다는 보여서다. 그래서 대놓고 눈물을 흘려보았다. 처음에는 식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게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났더니 나름 익숙해졌다. 지금은 아내나 아이들 앞에서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아내와 아이들의 반응도 별다르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조금 의아한 눈으로 보긴 했었지만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요즘 큰 아이는 눈물 닦으라고 휴지도 건넨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아내나 아이들이 나를 나약한 사람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 평가는 ‘잘못된 남자다움’의 관념이 만들어낸 근거가 뚜렷하지 않은 염려일 뿐이다. 남들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눈물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살면서 보여준 이미지가 눈물 몇 방울 때문에 뒤집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남자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고수하는 사람은 여전히 눈물을 남자답지 못함으로, 나약함으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동의하지 않는 다른 이의 시선 때문에 내 감정을 억지로 숨길 필요가 있을까?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면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적당한 수준의 현실적인 타협만 해도 눈물은 웬만큼 흘릴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눈물을 보여도 될 상대와 그렇지 않을 상대를 자연스럽게 구분한다. 나의 인사고과를 담당하는 임원과 눈물 콧물 쏟는 영화를 같이 볼 일은 거의 없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거래처 사람 붙들고 신세 한탄하며 눈물 쏟을 일은 더더욱 없다. 그 감각을 믿으면 된다.
우리 사회의 중년 남성들은 눈물에 대해 관대해져야 한다. 자기 감정에 충실해 지는 방법 중에 하나다. 자신의 슬픈 감정 하나 솔직하게 뱉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존감이 그만큼 낮다는 얘기 밖에는 안된다. 그런 자존감으로는 타자(他者)와의 관계맺기가 어려워지고, 자신 뿐만 아니라 남까지 피곤하게 만들기 쉽다. 다만,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착각하면 곤란하다. 무턱대고 사람을 미워하고, 아무 데서나 화를 내고,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웃어 대고, 맘에 드는 이성에게 한번만 만나 달라며 쫓아다니는 일은 결코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어린아이들이 제멋대로 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싫든 좋든 중년은 어른으로서 역할과 대우를 부여 받는다. 어른으로서 감정에 충실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인정하며 시간, 공간, 상대를 고려해서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해야 함을 말한다. 남자다움을 이유로 눈물을 참는 것도 감정을 거스르는 일이지만, 감정에 충실한답시고 아무 데서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된다. 눈물과의 적당한 타협이 필요한 이유다.
40대 남자들은 눈물을 참고 살아왔고, 앞으로 별다른 계기가 없는 이상 그렇게 눈물과 거리를 두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부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감정은 외부 자극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며 눈물은 그런 감정과 동조하는 몸의 반응이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만들어진대로 사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물을 참는다고 남자답다는 얘기를 듣는 시절은 지났다. 남자답다는 말이 칭찬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는 세상도 아니다. 슬플 때는 그냥 눈물을 흘리면 된다. 눈물에는 남녀노소, 위아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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