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읽고 생각하기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4)

김성열 2014. 9. 5. 21:17
728x90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4)


책 제목부터 신이 난다. 글줄기도 시원시원하고 내용도 명쾌하다진보는 싸가지가 없어서 욕을 먹으며 그 싸가지 없음은 우월감에서 나온다. 우월감의 대상은 여당 뿐만 아니라 민심까지 포함한다. 결국 우월감은 소통을 방해하며 무능으로 귀결된다. 극복하는 방법은 존중이다. 경쟁자를 존중하고 서비스의 수혜자(민심)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면 일패도지의 제로섬 게임을 극복할 수 있는 타협을 끌어낼 수 있다.

 

무력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즉 선거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반 유권자들의 정서를 무시해서 어쩌자는 건가.

 

진보적 지식 엘리트는 자신의 학벌 자본을 이용해 경제적으론 풍요를 누린다. 당위만을 놓고 보자면 진보가 보수에 비해 멋져 보이는 데다 그럴듯한 '도덕 자본'까지 누릴 수 있으므로 지식 엘리트의 이념 구성은 현실세계와는 달리 진보 지향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감정'에 무능하다 함은 진보에 감정 표현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 표현만을 두고 말하자면, 진보가 보수에 비해 훨씬 유능하다. …… 진보는 자기감정의 포로가 되어 감정에 이용당하는 쪽이다. 구경꾼(유권자)들의 감정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둔감하다. 그래서 무능하다는 것이다.

 

정치는 서비스 업종이며, 죽고살기식 투쟁보다 타협을 도모하는 편이 낫고, 좌우 대립 대신 내부의 엘리트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강준만 교수의 오래된 주장이다. 그런 내용의 타깃을 '싸가지 없는 진보'로 삼은 것은 진보가 그의 주장의 대척점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몇 차례의 선거를 통해 독선적이고 무능하다고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만 쳐다보는 모양새(우리 같은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 답답했으리라.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칭 진보라고 하는 정치세력과 정치인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지적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막스 베버가 말한 정치인의 윤리와 맥이 닿아 있다. 막스 베버는 윤리적으로 지향된 모든 행위는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중에 하나에 따라 수행된다고 했다. 그 중 신념 윤리에 기반한 행위에 대해 막스 베버는 단호하다.

 

갑자기 곳곳에서 신념윤리가들이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잇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 뽑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나는 먼저 그들의 신념윤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내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묻습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이들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낭만적 감흥에 도취하고 있을 뿐인 허풍선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직업으로서의 학문/직업으로서의 정치/사회학 근본개념>, 동서문화사, 1978)

 

강준만 교수가 말하는 싸가지 없는 진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막스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행위는 폭력적 수단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윤리 아래에서 수행 되어야 한다는 그의 전제는 정치인에게 책임윤리가 필수적임을 말한다. 물론 정치가에게서 신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정치가에게 있어서 신념이란 책임윤리에 의해 행동하겠다는 것 자체에 지나지 않음도  막스 베버는 말했다.

 

'싸가지 없는 진보'가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를 우선한다는 점은 일종의 본말전도다. 쉽게 말해 정치는 이타주의적 성격이 다분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의 진보(정치 세력)는 이타주의 대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 이기주의를 택한 것이다. 막스 베버 입장에서 본다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정치적 지지는 정치를 행하는 자들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따라 선택된다. 하지만 그 행동은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선택의 근거는 정량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험적이지도 않다. 결국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의 정치적 지지는 그 근거가 정서적이고 감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유권자의 정서와 감정을 외면하는 자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대들면 어느 누가 지지를 하겠는가


더구나 그들은 우월감에 쩔어서 그들과 다른 의견이나 사상을 쓰레기로 배척하기까지 하는 판이니 그 굴욕감을 딛고 굳이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이상에 손을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예전에 그런 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에 그들이 받았던 지지는 그들이 최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차악(그래도 저 한나라당 보다야 더하겠어?)이었기 때문임을 그들은 모른다.

 

새정련의 해체나 혁신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아차피 그 구성원이 같은 마당에 이름 바꾼다고, 지도부를 바꾼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문제는 태도다. 자신들만이 진리의 사도(그래서 주야장창 심판을 외치는 것인지도...)라는 그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 이상 일반 시민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주체의 자리에 설 수 없다.


물론 선거를 또 해도 어느정도 표를 받을 것이다. 차마 새누리당에 줄 수는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새정련에 줘야 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못해도 2등이라는 안도감에 젖어서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안주고 오래된 관념, 자기들만의 이념에 몰두했다가는 투표지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싸가지 없다는 직설에 감정적으로 발끈 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 감정은 그리 중요하면서 왜 유권자들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다) 왜 그런 소리를 듣는지 곰곰히 생각해야 할 일이다. 모르겠으면 이 책을 정독해 보기를 적극 권장한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