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한다. 살아있는 동안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든 찰라에 머무는 것이든 경험이 우리의 삶을 이어간다. 내 앞에 있는 경험과 그것에 대한 선택, 그리고 선택에 따라오는 또다른 경험이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경험은 중요하다. 경험 두고 행하는 우리의 판단과 선택이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라는 허울만 걸쳤을 뿐 단순한 기억이나 반응에 그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려 수도꼭지를 돌렸을 때 나오는 물은 어제의 그 물이 아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행위지만 매일 같은 물로 세수를 하진 못한다. 매일 아침 새로운 물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이지 않거나 인생에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접했다 해서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날씨도 좋고 간만에 시간도 있고 해서 설렁설렁 추리닝 바람으로 뒷산 꼭대기에 올라간 것은 그렇게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저 추억이나 기억이 될 확률이 무척 높다. 이에 반해 내 몸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이를 꽉 깨물고 오른 지리산 노고단의 경험은 뒷산보다 의미가 있다.
무엇이 경험과 기억의 경계를 가를까? 그것은 진지함이다. 경험은 내가 그것에 얼마나 진지했느냐에 따라 그 의미의 무게가 달라진다. 산을 오르거나, 해외여행을 가거나, 클럽에 가거나, 나이트에서 만난 사람과 원나잇을 하거나 따위의, 비록 다른 사람과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진지했느냐에 따라 경험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다.
산을 오를 때의 힘겨움, 해외여행의 이질적인 분위기, 클럽의 해방감, 원나잇의 관능적 쾌락은 누구나 겪는다. 누구나 겪고 느끼는 것은 의미있는 경험이라기 보다는 잘해야 희소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은 대상에 대한 감흥이 올곧게 나만의 것일 때, 보편적이지 않은 감흥을 얻었을 때 경험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같은 상황과 같은 처지에서 보편적이지 않은 나만의 것을 찾아야 비로소 경험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경험의 의미를 크게 하려면 진지해야 한다. 진지하게 접근하면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면 대상의 피상적인 면을 찢고 대상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결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남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읽었다'는 자체에 목적을 두고 읽은 책 10권과 글쓴이의 감정과 사상을 취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집중하여 읽은 책 10권의 무게는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젊을 때는 겪는 일들은 경험으로 쌓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있는 경험이 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살다보면 별의 별 일들을 겪지만 우리가 겪는 일들의 대부분은 이미 남들도 겪은 일들이다. 그것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진지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나 하더라도 진지해야 하고 이성을 만나더라도 진지해야 한다. 책을 한 권 읽고 영화를 한 편 보더라도 진지해야 하고 노래를 한 곡 듣더라도 진지해야 한다. 그 진지함이 경험의 무게를 더하고 그 경험의 무게가 우리 자신의 무게를 더하기 때문이다.
겪는다고 다 경험이 아니다. 남들도 다 느끼는 보편적인 감흥에 머문다면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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