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건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분노를 느낀다. 앞서 말한 것처럼 40대 남자들의 동선(動線)은 주로 일터와 집으로 편중되어 있다. 가끔은 친구를 만나거나 일이나 가정과는 상관없는 여가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상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쉬어가기'다. 어디까지나 일터와 집을 오가는 것이 40대 남자들의 본궤도다. 동선이 단순하다 보니 보니 겪게 되는 일이나 처하는 상황도 특별한 변화가 없이 거의 일정하다. 그날이 그날이고 그 일이 그 일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지만 고정되다시피 한 일상의 곳곳에 분노를 일으키는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일상의 분노
40대 남자들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낸다. 비단 40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그렇다. 덕분에 그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도 거의 일터에서 생긴다. 다만, 일터에 오래 있다고 해서 분노의 원인이 모두 일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노의 원인이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취업 포털 사이트인 사람인의 설문 조사에서 직장인의 47.8%가 ‘별 것 아닌데 트집 잡힐 때’ 화가 난다고 응답했다. 그 뒤를 이어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도 바꿀 수 없을 때(41.6%)’, ‘억울하게 혼날 때(39.5%)’, ‘인격모독 발언을 들을 때(38.6%)’,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을 때(37.4%)’, ‘야근, 주말근무 등 초과 업무를 해야 할 때(36.5%)’, ‘독단적인 결정에 따라야 할 때(33.5%)’, ‘성과나 능력을 과소평가받을 때(31.3%)’, ‘휴일에 회사 행사 등에 동원될 때(28.3%)’, ‘원치 않는 회식에 강제로 참여해야 할 때(23.6%)’, ‘업무 외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줘야 할 때(20.6%)’ 등이 화나게 하는 원인으로 꼽혔다.
응답들을 살펴보면 일과 관련된 것은 부당한 업무 지시, 초과 근무, 휴일 행사 동원 정도이고 나머지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일과 관련된 응답들도 꼼꼼히 따져보면 결국 사람의 문제로 회귀된다. 업무를 부당하게 떠안는 일과 휴일 행사에 동원되는 일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일에 떠밀려서 하게 된 초과근무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준다. 그런데 이런 상황들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주체가 사람이다. 당연히 분노한 당사자가 결정하지는 않는다. 자발적으로 부당한 업무를 떠안거나 초과근무를 자처하거나 휴일 행사 참여를 원했다면 분노할 일은 없다. 분노했다는 것은 분노할 상황을 초래한 결정을 다른 누군가가 했다는 것이다. 결국 직장인의 분노는 거의 대부분이 사람으로부터 온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화를 돋게 하는 사람이 주변인이 아니라는 정도가 직장인들과의 차이일 뿐이다. 자영업은 일의 특성상 손님과의 접점이 많다. 그래서 화를 나게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손님이다. 그들 중에는 반말이나 욕을 하고, 돈이나 카드를 계산대에 던지고, 억지에 가까운 클레임을 걸고, 심지어 성희롱에 가까운 행동까지 해대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갑질’과 ‘진상’이다. 제아무리 간과 쓸개를 빼놓고 하는 장사라도 이런 행동들 앞에서는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다. 몇몇 질이 좋지 않은 손님들의 '일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는 선량한 손님으로만 살아온 사람들의 순진한 오해다. 아르바이트생을 상대로 설문조사에 따르면, 손님으로부터 인격 무시, 불합리한 요구, 부당한 지시, 이유 없는 화풀이 등의 '진상짓'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81%였다. '또라이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일터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돌아갈 곳은 집이다. 집은 일터처럼 격렬하지도 않고 위계질서에 시달릴 일도 없다. 하지만 가정도 분노와 전혀 상관없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바깥보다 가정에서 분노가 더 쉽게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회사에서 상사가 빈정거린 말에는 화가 나도 꾹 참지만 아내가, 자녀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분노해서 발끈하게 된다. 실수한 부하직원에게 고함을 치고 싶어도 입을 꾹 다물지만 학원을 빼먹은 자녀에게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되려 직장에서는 화 한번 내지 않던 사람이 집에만 오면 폭력 가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족이라고 해서 분노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분노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오거스타 대학교 데보라 사우스 리차드슨(Deborah South Richardson) 심리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가족이 강력한 유대관계이기 때문에 분노를 직접 표현해도 그 관계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족은 이해관계로 얽혀 있지 않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의 감정 표현도 자유롭지만 그 감정들에는 분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나의 생활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로 인해 분노하는 경우도 있다. 잔혹한 살인이나 폭력 사건 같은 것들은 공격당하는 사람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을 일깨운다. 그런 사건들을 접할 때에는 실제로 희생을 당한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분노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다. 특히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 아이, 학생, 노인 등이 피해자인 사건이나 사고를 접하면 가해를 한 당사자에게 해를 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분노는 증오하는 대상에게 해를 가하려는 욕망'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다. 또, 공정하지 않은 사회 구조나 만성적인 사회 부조리도 분노의 원인이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된 정치, 만인에게 공정하지 않은 법률, 무사안일한 행정, 특정 계층을 향한 혐오, 소득과 빈부의 격차 같은 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로 인해 생긴 좌절감과 열등감 같은 감정들은 분노의 씨앗이 된다.
화병의 탄생
문제는 이런 분노들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터에서 생긴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다가는 자리를 지키기 힘들고 장사를 계속하기 어렵다. 직장인은 회사의 부당한 대우와 상사의 인격을 짓밟은 언행 앞에서도 절대 분노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넌 그 머리로 대학은 어떻게 나왔냐?", "일은 겁나게 못하면서 퇴근은 칼이네. 네가 사장해라." 같은 말에 발끈했다가는 조직의 뜻을 거스르고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분노하는 이유의 정당함을 떠나서, 사직서를 쓸 각오가 서지 않은 이상 상사를 향해서 분노의 화살을 겨눠서는 안 된다.
비슷한 직급의 동료직원에게도 분노를 표시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성격 안 좋은 사람으로 찍혀 평판이 깎이고 따르는 사람이 적어져 조직 안에서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든다. 부하직원 역시 함부로 화를 낼 대상이 아니다. 사고를 저질러 부서를 뒤집어 놓고서는 약속 있다고 총총히 퇴근하는 모습에도 화를 눌러야 한다. 마음 그대로 분노를 표현했다가는 권위의식에 찌든 꼰대로 낙인찍힐 것이고 리더십에 흠집이 생긴다. 승승장구까지는 아니어도 남들만큼 진급하고 대우받으려면 동료직원, 부하직원에게 분노를 표시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손님의 갑질과 진상질에 울컥해서 분노를 시전 했다가는 손님과 싸우는 가게로 소문난다. 분노의 원인 제공을 손님이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장사하는 사람에 대해 바라는 기본적인 태도를 고수하지 못하면 영업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고약하고 막돼먹은 손님의 갑질과 진상질을 분노로 응징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정서적인 개운함 정도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장사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포화상태인 자영업 시장에서 오래 버티고 싶다면 아무리 손님이 분노를 자아내도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떤 관계보다도 밀접하고 친근한 가족 역시 분노의 대상으로 삼으면 곤란하다. 예전에는 가장이 폭군처럼 구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지금의 70대~80대가 그랬고 그 전은 더 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서 가장의 분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이제 드물다. 함부로 분노를 표현하다가는 가족들로부터 소외된다. 심하면 이혼을 당하거나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가족에게 버림 받는다는 것은 조건 없는 아량을 베풀어줄 최후의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대착오적인 분노는 그 대가도 크다.
그나마 사회의 구조나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술 한잔 걸치고 세상 더럽다고 욕을 하는 것 정도는 남에게 피해만 크게 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 주는 것이 아직까지 세상의 인심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막연한 분노 표현은 분노를 유발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킬 수도,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격하게 분노를 표현하다가는 공권력에 의해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다. 그 의지와 신념이 정의롭다고 할 지라도 분노의 대가는 치를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분노는 마음속에 쌓인다. 권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배경을 등에 지고 마음껏 화를 내고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분노를 표현할 여유가 없다. 분노의 표현에도 위계질서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가감 없는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분노는 속으로 삭여야만 한다. 미디어로 널리 퍼졌던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기억할 것이다. 광기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영상을 보면서 분노가 치솟는데 그 악다구니들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피해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런 분노를 삼키고 있는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분노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쉽사리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분노를 느꼈던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의 감정은 처음인 듯 솟아오른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야 분노도 사그러지는 것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고, 가슴에 쌓인 분노를 털어낼 기회도 적다. 분노는 다른 감정들과 달리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서서히 옅어지지도 않으며 오히려 분노한 경험을 기억할 때마다 더욱 견고해진다. 사람의 마음은 담을 수 있는 감정에 한계치가 있다. 켜켜이 쌓인 분노의 감정이 마음이 담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부아가 폭발하면서 몸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화병은 그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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