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40대 남자

40대의 연혁 (2) - 서울올림픽과 6월 항쟁

김성열 2017. 6. 2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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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연혁 (2)


40대 후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40대들이 대통령이 어떤 지위인지 대충이라도 인식하게 된 때는 1980년대 이후라고 봐야 한다. 그 때가 되어서야 국민학생이 되어 벽에 걸린 대통령 사진을 보면서(당시에는 교실이나 복도, 혹은 교무실에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국가 중심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이었던 지금의 40대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은 관심 밖이거나 어른들의 어려운 얘기일 뿐이었다. 그 때의 대통령이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다는 것, 대통령이 되기 전 5.18 광주 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것, 99.9%의 찬성률로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나중 일이었다. 


엄혹했던 그 때도 국민학생, 중학생이었던 40대에게는 그저 '학창시절'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경제는 호황이었고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흑백 텔레비전으로 태권V를 보던 아이들에게 컬러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은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발전과 반공 사상의 승리를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른들은 여전히 체제 순응적이었다. 정치 체제가 어떻든 간에 삶의 질은 나아지고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펼쳐 사람들의 이목을 정치에서 떼어놓았다. 프로야구를 보러 야구장으로,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통금이 없는 밤을 즐기기 위해 시가지로 나선 사람들에게 정치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체제 변화에 대한 요구는 커졌다. 대학교가 있던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 유독 심했던 대학생들의 시위 행렬과 까만 헬멧을 쓰고 방패와 진압봉을 든 전경들의 대치 장면, 하굣길 버스 안에까지 스며들던 최루탄의 메케하고 따끔한 냄새를 말이다. 지금 40대 중반이라 해야 중학생이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 리는 없었다. 밥상머리에서 어른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을 데모꾼이라 욕하는 소릴 들으며 하라는 공부도 안하고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나쁜 형, 누나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저항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환경과 사회환경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들 알지만, 어렸던 그때 사회에 이해는 온전한 나의 몫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런 상황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참여했던 40대가 있다면 당시 대학을 들어갔던 1968년생이다. (그 때는 연초 출생으로 학교를 또래보다 1년 일찍 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1969년 생도 일부 포함된다.) 지금 50대를 바라보는 만 49세의 40대 최고참들이 흔히 말하는 '386세대'의 서열 마지막에 있는 사람들이다. 1990년대 중후반 당시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을 386세대라고 부르니 386의 세대의 서열 막내가 ‘87학번’이고, 이들이 ‘빠른 69’를 포함한 1968년생이다. 그들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현장에서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절차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직선제로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덕분에 지금 40대들은 투표권을 처음 행사할 때부터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직선제라는 시스템을 ‘쟁취’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염원하던 정권교체는 이루지 않았다. 김대중, 김영삼이라는 민주세력의 두 지도자가 단일화에 이르지 못해 결국 1987년 12월에 있었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인 노태우가 당선 되었다.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이어졌던 노태우 정권은 군사 독재 세력의 잔재였지만 표면상 이전 체제보다 온건했다. 


세계 경제의 호황을 등에 업고 연평균 8%가 넘는 경제 성장률, 실업률 2%대를 기록하는 등 삶의 환경도 크게 나아지고 있었다.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가의 위상을 세계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전 몇 십 년에 비해서는 자유와 번영이 판을 치고 있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마이카(My Car)’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문화적 다양성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다. (한국 상업 음악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해가 노태우 정권의 말기인 1992년이었다.) 


지금 40대 초중반은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자본주의 체제 논리에 의해 입시교육에 떠밀렸다. 40대 중후반은 대학교 진학률이 30~40%대였지만 1977년생이 입학하던 1996년 대학진학률은 50%를 넘었다. 1990년을 기점으로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미디어에 숱하게 등장했다. 학업 스트레스, 정확히는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학생들이 죽음을 택하는 일이 잊을만 하면 뉴스를 탔다. 당시 어른들은 '좋은 대학 = 좋은 직업 = 행복한 인생'이라는 등식을 강요했다. 그 등식은 지금도 유효해 어른이 된 지금의 40대는 그 등식에 동조하며 (동의하지 않더라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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