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삶과 사람

사람이 그냥 싫은 이유

김성열 2015. 1. 1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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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음'은 감정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지성과 의지가 아닌 감정의 문제다. 미움, 증오, 혐오 같은 감정이 싫어함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이 싫은 이유는 수 백, 수 천가지다. 외모, 말투, 옷차림, 행동, 신념, 종교, 정치성향, 능력, 말주변 등등, 한 사람의 모든 것은 그 사람을 싫어할 이유로 손색이 없다. 그런가 하면 이유 없이 사람이 싫고 미울 수도 있다. "나 저 사람 싫더라." "왜? 뭐가 맘에 안들어?" "아니, 그냥 싫어." 당사자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넌 천하의 X새끼야"라는 욕을 하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이라는 대답이 돌아온 셈이다. 얼마나 속이 터지겠는가?


당사자의 답답함을 떠나서 생각해도 '그냥'을 사람 싫은 이유로 삼기에는 뭔가 모자란다.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부당하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현상이든 상황이든, 싫고 좋음에는 이유가 있다. 싫은 마음은 감정이다. 감정은 어떤 현상, 상황, 대상의 자극에 대한 마음(정신)의 반응이다. 자극 없는 반응, 액션 없는 리액션은 없듯이 이유 없는 감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냥' 싫은 것도 이유가 있는 법이다.


차마 말 못할 이유

'그냥' 사람을 싫어하는 (싫어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차마 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다. 대표적인 경우가 열등감 때문에 사람을 싫어할 때다. "나보다 더 잘나 보여서 싫어."라는 말은 자신의 치부와 열등감을 인정하는 셈이라서 쉽게 내뱉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질투나 시기 같은 감정 때문에 누군가를 싫어할 때도 이유를 속시원히 말하기 어렵다. 이럴 때 '그냥'이라는 표현이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다른 하나는 첫인상의 편견이 지속되는 경우다. 우리는 짧은 만남에서 사람의 이미지나 호불호를 판단한다. 이미지 컨설턴트인 카밀 래빙턴(Camile Lavington)과 스테파니 로시(Stepahanie Losse)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상은 단 3초에 결정된다고 한다. 또, 미국 프린스턴대학 심리학 연구팀이 실험해 보니 사람의 인상에 대한 판단은 0.1, 0.5초, 1초 사이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짧게 잡으면 0.1초라는 짧은 시간 만에 한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첫인상과 초두효과

이렇게 만들어진 첫인상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지면 한 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는다. 이 현상은 초두효과(Primacy Effect)로 설명할 수 있다. 초두효과는 처음 받아들인 정보가 나중에 받아들인 정보보다 훨씬 강력하게 각인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첫인상을 결정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의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면 판단과 믿음을 수정할 수 있다. 이 때 초두효과가 작용하면 기존의 판단과 믿음을 쉽게 수정하지 않게 된다.


예의 바르지 않다는 첫인상 때문에 새로 입사한 직원을 싫어했다고 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직원이 무척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첫인상에서 얻은 판단과 믿음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 초두효과가 작용하여 (새로운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있던 '싫다'라는 감정은 그대로 살아 숨쉬는 것이다.


그냥 싫어지는 과정

이제 '그냥 싫은' 상황이 된다. '싫다'라는 감정은 초두효과 덕분에 여전하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예의 바르다)에 의해 싫은 감정의 근거(예의 바르지 않다)가 의미를 잃어버렸다. 예의 바르지 않기 때문에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제 구실을 못하고 초두효과에 의해 '싫다'라는 판단만 남은 것이다. 싫지만 댈 만한 이유가 없으니 '그냥 싫다'라는 감정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냥' 미움을 받아야 하는 이런 상황은 딱히 해결 방법이 없다. 내가 왜 X새끼인지 이유를 말해달라고 졸라봤자 욕한 당사자에게는 말해 줄 의무도 없고, 때로는 이유조차 없을 수 있다. 기껏해야 '난 네가 처음부터 싫었어!' 같은 상투적인 답만 들을 확률이 높다. 질투와 시기, 열등감을 거두도록 못난이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타임슬립을 통해 첫만남 때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그저 막막할 뿐이다. 사람 사는 게 만만하지가 않음을 이렇게 또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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