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삶과 사람

최대주의적 에토스를 경계하라

김성열 2014. 4. 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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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주의(맥시멀리즘 Maximalism)는 '더 많은 것이 더 많다','큰 것이 아름답다'라는 심미적 원칙에 기초한 문화예술의 경향을 말한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이를 사회적 경향에 확대 적용해 한국사회가 최대주의적 에토스(성격, 관습)에 젖어있다고 했다. 임지현 교수가 말하는 사회적인 측면의 최대주의는 일종의 거대함에 대한 강박이자 집착이다. 임지현 교수의 말을 빌리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최대주의'는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 간의 이론적 결속력을 공고히 해주는 반면, 이성적 비판에 열려있지 않은 폐쇄적 사고 체계를 낳는다. 예컨대 레닌이 이야기한 100가지 중에서 95가지만 수용하고 5가지를 비판한다면, 그는 이미 레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 '최대주의'의 지적 풍토이다.


이러한 최대주의적 에토스는 비단 사상적인 측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큰 것이 선(善)'이라는 원칙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되어 서로의 사상이나 의견이 겹치는 부분을 최대화하려는, 그리고 그것이 최대화 되었을 때 비로소 관계를 인정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대로 사상이나 의견이 최대화 되지 않을 때 관계 정립은 원할해지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경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떤 특정 사안을 놓고 누군가와 의견 대립을 한 후에 (일방이든 쌍방이든) 상대방과의 관계를 거부하거나 관계가 아예 단절된다든가, 논점 자체는 일치하지만 세부적인 사안 몇 개에 대해 의견이 다름으로 인해 결국 논의가 결렬되는 경우가 그런 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내가 직장 동료 A를 싫어하는데 평소 나와 관계가 원만하던 B라는 동료가 A를 좋아하면 그 B라는 동료와 관계를 '정리'한다든가, 10개의 사안에서 8개를 합의하고는 2개 때문에 상대와 내가 의견이 '완전히 다르다'고 인식하는 경우다.



이는 (임지현 교수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최선'에 대한 강박과 집착 때문에 '차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최선'은 '가장 좋은 것'이며 나쁜 것을 배제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최선'을 추구할 때는 상대에게 좋은 것이라도 나에게 나쁜 것이면 배제하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이 때의 논의는 '나에게 좋은 것'이 우선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의견 대립이나 충돌을 싸움으로 풀어나가는 일이 흔해진다.


'차악'은 '가장 나쁘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에게 좋더라도 상대에게 나쁘다면 버리게 되므로 그 결과값은 '최선'보다 작을 수 있지만 서로가 그나마 만족할 수 있다. '차악'을 전제로 한 논의는 상대방의 의견을 배려하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최선'을 구하는 것보다 협상과 연대의 가능성이 크다. 투쟁으로 인해 자원을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최선'을 구하는 것보다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대주의적 에토스는 불관용을 전제로 하며 이해와 동의가 모두 일치하는 경우에만 관계 정립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 주변에서 독재적, 제왕적, 가부장적, 독선적 습성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습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이러한 습성을 강요한다. 누구라도 독재적, 제왕적, 가부장적, 독선적 인간으로 평가받거나 스스로 나서서 그러한 자신을 만들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 안에 최대주의적 에토스가 베어 있지 않을까 살펴야 하며 눈 앞에 드러나 최대주의적 에토스를 거부해야 한다. 


'열린 사고', '관용', '역지사지'는 최대주의와 반대되는 말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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