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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

고향 (이기영 지음, 문학사상사, 1994)

고향 (이기영 지음, 문학사상사, 1994) 그의 문장은 멋스럽지만 가식이 없다. 넘실거리는 생생함이 있다. 잘 익은 나락, 고즈넉한 오후의 부락 어귀, 달빛이 쨍한 여름밤 밭둑, 비늘처럼 반짝이는 개천의 풍경을 열두폭 병풍처럼 눈 앞에 훤히 펼친다. 그런 글재주로 농촌의 안락함과 따스함만을 그렸다해도 아주 좋은 글이 되었겠지만 은 그렇지 않다. 그 풍경 속에서 움싯거리는 사람들은 결코 서정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기아에 전복되어버린 노동의 가치와 극복을 선택할 수 없는 환난과 비참, 그 안에서 아둥거리는 힘 없는 사람들의 지난한 삶, 이론과 지성의 무력함에 힘이 빠진 자발적 선각자들의 절망과 갈등이 풍경의 속살이다. 자본이 득세하면서 가난과 노동은 대를 잇는 순환의 출발점에 선다. 토지의 신성함과 노동의..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1998)

변신.시골의사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1998) 인간은 스스로와 타인을 기만한다.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이익을 위해, 권위의 보존을 위해 기만하고 기만 당한다. 기만을 하는 쪽에게나 당하는 쪽에게나 궁극적으로는 살기 위한,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의 하나다. 인간에게 생존의 욕망은 예의 간절하고 절박하다. 그래서 인간의 기만은 강압과 폭력의 모양새를 취하기 일쑤다. 인간은 그렇게 타인과 자신을 강제해 기만의 산물을 보편적인 행위 양식으로 규정하고 타협을 통해 서로의 생존을 용인한다. 기만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설사 죽음으로 기만의 사슬을 끊으려 든다 해도 그 죽음조차 기만의 산물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을 외면할 수 없기에 죽음조차도 기만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미 기..

달과 6펜스(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2000)

달과 6펜스(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2000) 나이가 마흔쯤 되면 속앓이를 하기 마련이다. 또한 살아감을 위해 노동에 나를 던져넣고 감성 대신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합리성이라고 이름 지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인생을 찬미하는 것도 40대다. 문득 잊었던 것들이 생각나면 약간의 일탈을 시도하기도 한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을 만나거나 술에 빠져보거나, 등산에 빠져보거나 한다. 남은 삶 동안 계속 그런 것들에 빠져 살 수도 있지만 역시나 합리적인 생각이 앞서서 적당히 절충을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50이 되고, 60이 되고,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야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 대부분 그렇게 산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나이 마흔에 이르러 안정된 직업과 행복한 가족을 벗..

관촌수필 (이문구, 문학과지성사, 2000)

관촌수필 (이문구, 문학과지성사, 2000)일찍 읽지 않아서 다행인 책들이 있다면 나에게는 이문구 작가의 관촌수필이 그짝이다. 일찌감치 읽고 기억 저편으로 넘겼다면, 소설을 되짚어 읽지 않는 나의 버릇(현진건의 소설은 예외긴 하다) 덕에 기억 한켠에 먼지만 쌓여갔을테니까.이 유명한 소설을 왜 이제야 읽었냐고는 하지 마시라. 그나마 누군가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으니, 타박 대신 축하를 바라는 심정이다.산마루의 잇닿은 등성이처럼 넘실거리는 문체, 숨소리가 귓전에 흠흠대는 충청도 사투리, 여기에 내가 어설프게나마 겪었던 (진짜가짜 같은) 향촌 부락의 담벼락 아래 이야기들이 책에 그득하다.제목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어느 옛날 선비가 지은 시의 한구절이라고 해도 좋을만하다. 일락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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