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말하기/직장생활

'열정페이'는 슬픔을 담보로 한다

김성열 2014. 12. 12. 11:59
728x90


통계청(e-나라지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우리나라의 대학교 진학률은 70%를 웃돈다. 대학 졸업장만으로 직업을 선택하던 30년 전과는 판이 다르다. 덕분에 취업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취업 준비생들은 근사한 스펙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학교 성적은 기본이고 자격증, 외국어 능력, 대외 수상 경력, 업무 경험, 봉사 활동, 심지어는 해외 여행까지도 모두 스펙의 요소다. 특히 취업하고자 하는 분야와 관련한 업무 경험은 취업 경쟁에서 꽤 쓸만한 무기로 인정받는다. 스펙이 비슷한 사람들을 놓고 본다면 관련한 업무 경험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니 입사 경쟁에서 경험의 가치는 클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취업 준비생들은 경력과 경험을 만들기 위해 인턴이나 계약직,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인턴이나 계약직은 능력이 입증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은 '경험 쌓기' 툴이다. 하지만 인턴이나 계약직이라고 해서 만만치는 않다. 실무 경험도 없고 공식적인 지위를 보장 받지도 못한 상황에서는 괜찮다고 자부했던 스펙마저도 별 쓰임새가 없다.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열정이라는 마음가짐과 태도다.


그런데 이 열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경험 쌓기를 원했으니 그 기회를 갖는 대신 희생을 감수하라'는 논리로 접근한다. 이를테면 인턴이나 계약직으로 고용하고서는 일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보수를 주지 않는다거나 인턴들의 내부 경쟁을 빌미로 무리한 업무를 강요하고 인격 모독이나 언어 폭력 등을 가하는 식이다. 특히 패션 업종이나 영화, 연극, 방송, 호텔 실습 등에서 이런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조어가 '열정페이'다. '열정'이 있다면 '페이(pay)'는 문제 삼지 말라는,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으니 그것으로 보수는 충분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뜻풀이가 어찌 되었든 이러한 대우는 엄연한 노동력 착취다. 착취는 부당한 행위이며 우리는 부당한 행위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기회를 얻기 위해 착취라는 희생을 감수할 마음이 있었으니 '열정페이'에 대해서 분노나 증오의 감정이 앞서지 않는다. 대신 '열정페이'의 이면에는 슬픔의 감정이 무겁게 자리한다.


열정페이의 당사자들은 이력서에 들어갈 한 줄의 경력을 만들기 위해, 정직원이 될 경쟁자로서 자격을 얻기 위해 착취라는 부당함을 용인한다. 열정페이라는 이름의 착취는 옳은 것과 선한 것을 추구하려는 보편적인 양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 부당함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일으킨다. 이력서에 넣을 한 줄의 경력을 위해, 정직원이 되기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해 양심의 소리에 귀 막고 분노와 증오를 삼키는 자신을 보고 있으면 비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나를 비루하게 느끼면 자긍심은 곤두박질친다. 우리는 자긍심을 잃어버릴 때 깊은 슬픔에 빠진다.


풍족하게 사는 것만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인생에 의미를 담기 위해, 만족한 삶을 위해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갖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 하지만 상황은 역설적이다. 직업은 삶의 한가지 방편일 따름인데 그것을 위해 자긍심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며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삶의 수단에 더 매달릴수록 열정페이는 보편적이 되어갈 것이며 우리의 삶은 더 슬퍼질 것이다. 어쩌면 열정페이는 열정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담보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00x250